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

돌아오는 문장

by Helia

끝내 말하지 못한 말은 늘 나중에 돌아온다. 그때는 삼켜졌지만, 사라진 적은 없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면 공기 속으로 흩어지지 못하고 몸 안에 남는다.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다가 조용해지는 순간을 골라 다시 떠오른다. 나는 그런 문장을 몇 개쯤 품고 산다. 아니, 그 문장들이 나를 품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의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 가볍게 웃으며 넘기던 표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니라고, 그건 내 마음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관계의 온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늘 둥글게 남는 쪽을 택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순간,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다만 그 대가가 있었다. 침묵은 바깥을 잠재우는 대신 안쪽을 울린다. 겉은 잔잔했지만 속에서는 작은 파문이 오래 이어졌다.
처음에는 사소한 서운함이었다. 금방 잊힐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 감정은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어떤 날은 분노가 되었고, 어떤 날은 자책이 되었고, 또 어떤 날은 그리움이 되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자리를 옮겨가며 나를 건드렸다.

왜 그때 말하지 못했을까. 상처받을까 봐. 혹시 거절당할까 봐. 가벼워 보일까 봐. 혹은 너무 진지해 보일까 봐. 나는 늘 나를 뒤로 세워두었다. 이해하는 사람, 괜찮은 사람, 문제를 만들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 욕심이 나를 조용히 묶어두었다.
침묵은 안전해 보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나는 조금 줄어들었다. 내 안의 한 조각이 접힌 채로 남았다.

밤이 되면 진짜 감정이 고개를 든다. 낮에는 괜찮은 척 흘려보낸 문장들이 줄지어 선다. 그때 나는 속상했다. 서운했다. 사실은 많이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무거울 줄 몰랐다.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를 택했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스스로를 의심한다. 내가 느낀 게 맞았는지,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그 정도로까지 흔들릴 일은 아니었는지. 그러나 지금은 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마음이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조용했다고 해서 약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깊었기에 쉽게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후회는 늘 뒤에서 따라온다. 이미 지나간 장면을 붙잡고 혼자서만 또렷해진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왜 한 문장도 꺼내지 못했을까. 상상 속의 나는 단단하다. 숨을 고르고,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말한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한 박자 늦었다. 그 한 박자가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몰랐다.

말하지 않은 선택도 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은 조용하지만 길다. 관계를 지키는 대신 나를 조금씩 깎아낸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마음은 속지 않는다. 조용한 순간마다 같은 자리를 두드린다.

끝내 말하지 못한 말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사람은 어쩌면 너였겠지만, 이제는 나다. 나는 나에게 말한다. 그때 나는 충분히 아팠다고. 충분히 좋아했다고. 충분히 진지했다고. 그 감정을 축소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여전히 두렵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를 가장 마지막에 두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의 표정이 흔들릴까 걱정하기 전에, 내 표정부터 지우지 않으려 한다. 말은 서툴 수 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도망치지 않으면 된다.

모든 고백이 관계를 지키지는 않는다. 어떤 고백은 멀어짐을 부른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남는다. 나는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기록.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혹시 지금도 마음속에 묻어둔 문장이 있다면, 너무 오래 재워두지 않았으면 한다. 말은 때를 놓치면 방향을 잃는다. 침묵은 편하지만 오래 가면 무겁다. 나는 그 무게를 오래 들고 있었다.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작은 것부터 꺼낸다. 싫다고. 좋다고. 서운했다고. 고맙다고. 사소한 말들이 쌓여 나를 만든다. 한 번, 또 한 번 입을 열다 보면 언젠가 더 큰 마음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끝내 말하지 못한 말은 늘 나중에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먼저 내보내고 싶다. 돌아올 길을 만들지 않기 위해. 목 안에서 굳어버린 문장이 되지 않기 위해.
언젠가 다시 비슷한 장면이 찾아오더라도, 그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나를 뒤로 미루지 않았다고. 나는 내 마음을 끝까지 들여다보았다고.
그 한 문장만으로도, 오래 붙들고 있던 침묵은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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