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너를 닮은 장소 하나

남은 건 장소뿐인데, 왜 마음은 아직도 그 안에 머무는 걸까.

by Helia

비는 여전히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다온은 오늘따라 평소보다 오래 잠에서 깼다.
문득 떠오른 장소.
‘그곳에, 혹시…’
생각이 말보다 빨랐고, 어느새 발걸음은 성북동의 오래된 서점 앞에 멈춰 있었다.

간판은 거의 지워져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 틈, 유리문 옆 벽면과 벽 사이.
어설프게 끼워진 낡은 공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춤하다가 결국 꺼내 들었다.
첫 장, 단 하나의 문장.

> “다 온아, 말 대신 남긴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의 글씨였다.
그가 쓰던 모난 획, 억지로 눌러쓴 듯한 잉크 번짐.
그 순간, 지금껏 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말 대신 남긴다.
그는 끝까지 직접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라질 때도, 사랑할 때도, 이별할 때조차.

다온은 노트를 품에 안은 채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세 번째 골목, 왼쪽 벽, 붉은색 스프레이 낙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여기서 그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날,
이현은 다온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언제 다시 돌아와도… 너는 괜찮을 수 있어야 해.”

그 말이 이별의 예고였다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왜 그가 떠나기 전, 그렇게 오래 벽에 기대 서 있었는지도.

다온은 노트를 다시 펼쳤다.
짧은 문장들 사이에 한 장이 찢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 “내가 사라졌던 모든 시간은 너를 향하고 있었어.”

그 문장을 읽고, 그녀는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서늘한 공기도 전부 멀게 들렸다.
이현은 도망친 게 아니었다.
감당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시간을 건넨 것이었다.

다온은 그 벽에 등을 기대며 중얼였다.
“나도… 너를 기다린 게 아니라,
계속 너를 살아낸 거였어.”

빛은 없었지만, 마음 어딘가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지는 듯했다.
그가 떠난 자리 위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울었다.

“그 사람, 여전히 너 안에서 살아 있지?”

카페 주인의 말에 정다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떼는 순간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이현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말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던 날.

“괜찮아. 다 지나가.”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계절이 바뀌어도 그대로 남는다.
무언가가 끝나버린 장소는, 누군가에겐 시작이 되기도 하니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노트를 펼쳤다.
페이지가 바스락거렸고, 잉크는 번져 있었다.
글씨체는 여전히 어설펐고, 종이는 낡아 있었다.

> “그날의 네 눈을, 아직도 기억해.”
“사라지려던 건 내가 아니라, 나를 삼킨 마음이었어.”

이현의 흔적이었다.
다온은 손끝으로 문장을 따라 쓰다듬었다.
그가 전하지 못한 말들이, 이 작은 노트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너를 위한 이별이었을까, 나를 위한 도망이었을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골목길 끝에서 자신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는 언제나 사라지는 쪽을 선택했다.
남는 고통보단 떠나는 외로움을 견디는 사람이었다.

> “사라졌지만, 한 번도 널 놓은 적은 없어.”

그의 문장은 늘 그렇게 어중간했다.
마침표 없이 끝나고, 설명 없이 남겨졌으며,
그래서 더 오래 가슴에 남았다.

다온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이별은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
노트 마지막 장 뒤에서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숨을 삼키며 천천히 펼쳤다.

> “돌아가는 길엔 네가 없을 테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그 자리에 설 거야.”

숨이 막혔다.
이건 그냥 우연히 발견된 흔적이 아니라,
그가 그녀를 위해 의도적으로 남긴 안부였다.

그는 여전히,
이 도시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온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접어 노트에 다시 끼웠다.
무언가 건드리면 사라질까 봐,
그 감정이 다시 식어버릴까 봐 숨조차 아꼈다.

그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음으로 모든 걸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방식은 불친절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카페 유리창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창밖은 여전히 흐렸고,
세상은 그대로인데 마음속은 무언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정말, 널 용서하고 있는 걸까.”
다온은 입속으로 묻듯 말하고 스스로 웃었다.
“아니,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말 대신 남긴 노트,
이름 없이 남은 페이지 하나,
그리고, 그가 앉던 이 자리.

모든 게 그의 체온처럼,
천천히 그녀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