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 이아

살지 않았던 시간 속의 나에게

by Helia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시절인데, 이상하게 그립고 낯설지 않은 감정이 있다. 브라운관 속 흑백 화면, 창틀 아래 놓인 라디오,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조용하고 느긋한 거리 풍경. 나는 그 시간에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어딘가에 그리움이 남아 있다. 그 감정을 가리켜 우리는 '아네모이아(Anemoia)'라고 부른다. 살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

어릴 적부터 내 마음 한편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있었다. 어른들이 앨범을 꺼내며 70년대 사진을 보여줄 때,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 흐릿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에서 이상한 평온을 느꼈다. 어떤 날은 오래된 노래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고, 낯선 시대의 영화를 보고선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그건 단지 복고 감성이나 감상적인 취향이 아니었다. 마치 그 시절에 내가 있었던 것 같은 착각. 마음이 먼저 기억해 버린 시간.

아네모이아는 머리가 아닌 마음이 먼저 반응하는 감정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사실보다 오래된 사진 한 장, 흘러간 노래 한 구절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는 “그건 단순한 감상에 불과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감정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진하게 마음을 물들이는지. 마치 오래전 떠난 연인을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애틋하고 아련한 감정.

나는 이 감정을 글로, 사진으로, 그림으로 붙잡고 싶었다. 내겐 익숙하지 않은 그 시절의 공기, 색, 소리들이 나를 이끌었다. 예를 들어, 80년대의 낡은 버스 정류장, 반투명한 분홍 커튼이 드리운 오후의 거실, 조용한 LP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한 곡. 그런 이미지들이 나의 창작과 사유의 원천이 되었다. 내가 겪지 못한 시간들인데,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만날 수 있었다. 현실의 소음보다 과거의 정적이 내게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어쩌면 아네모이아는 우리가 지닌 상실의 기억이 투영된 감정일지도 모른다. 다 겪어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 놓쳐버린 가능성과 시간이 담긴, 그 허공에 대한 애틋함. 하지만 이 감정은 단순히 슬픔만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들고, 더 넓은 시간 감각 속에 머무르게 한다.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아네모이아를 느낀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감성의 여정을 떠나는 일이다. 타인의 삶에 공감하고, 시대를 넘어 감정을 이해하는 힘.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나의 시간이 아닌 누군가의 시간에 잠시 머물며, 그 시대의 온기를 마음에 담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근사한 위로인지.

살아보지 않은 시절이 왜 이토록 그리울까. 그것은 아마도 그곳엔 아직 때 묻지 않은 느림과 여백,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천천히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 잃어버린 고요와 여유를 갈망한다. 아네모이아는 그래서 그저 복고적 감상이 아니라, 내면의 휴식이고, 소중한 회복의 감정이다.

오늘도 나는 오래된 책장을 넘기다, 낯선 시대의 잡지를 꺼내어 읽는다. 그 속엔 내 얼굴은 없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온기가 있다. 내 것이 아니었던 시간, 그러나 왠지 내 마음에 오래 머무는 시간. 그게 바로 아네모이아다.
그리움이 반드시 ‘경험’으로만 오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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