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온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가슴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말해봐, 괜찮아, 여기 있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오래도록 침묵 속에 머물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요한 어둠을 품고 산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 한편엔 차마 꺼내기 힘든 기억 하나쯤은 꼭 숨겨져 있다. 내게도 그랬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배신으로 끝났고, 신뢰했던 사람이 등을 돌렸으며,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무너지는 건 그 일이 벌어졌을 때가 아니라,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삼켜야 할 때였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입을 닫은 채 멀쩡한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매일매일 속에서 더욱 자라났다. 누군가는 말했다. “시간이 약이야.” 하지만 그 말은 다 아문 사람들의 언어였다. 상처는 시간만으로 낫지 않는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묻고, 내가 스스로 말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물기 시작한다.
“Tell me what happened.”
단 네 단어지만, 이 말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열쇠가 되었다. 그 문장은 의심이 아니라 신뢰로, 호기심이 아니라 배려로 다가왔다. 말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네 편이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고백, 부끄러운 상처,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말을 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다는 건,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말을 들어준다는 건 단지 귀를 빌려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마음, 온기와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들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이렇게 말해보길 원한다. “Tell me what happened.” 그리고 그 말에 진심으로 대답해 본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 문장을 나 역시 누군가에게 건넨 적 있다. 울고 있는 친구에게, 어딘가 달라진 연인에게, 갑자기 조용해진 동생에게. 처음엔 그들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은 길었고, 때론 뒤엉켰지만, 결국 그것은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나의 마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세상에는 미처 설명하지 못한 고통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물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질문에는 기다림과 믿음이 함께 담겨야 한다. 모든 이들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했던 날들보다, 말할 수 있었던 날들이 더 많아지길.
그리고 그 시작은, 누군가의 아주 단순한 한마디일 수 있다.
“Tell me what happened.”
그 말은 누군가의 밤을 밝혀주는 작은 불빛이 된다.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