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서머’를 보며

상실 이후의 나

by Helia

영화 500일의 썸머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지만, 동시에 그것이 "사랑 이야기 아님"을 선언하며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현실적인 연애’로 기억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머무른 감정은 현실적이라기보다 잔인할 만큼 사실적인 서늘함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 마음이 도달하지 못할 때, 남겨진 사람은 얼마나 오래 그 기억 안에 머물게 되는지. 이 영화는 바로 그 시간을 500일간의 기록으로 보여준다.

토마스는 평범하고 감성적인 남자다. 운명을 믿고, 사랑을 믿는다. 그는 썸머를 만난 순간 “운명”이라 느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확신했다. 썸머는 그에게 웃어주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줬고, 가끔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말했다. “진지한 관계는 원치 않아.” 그 말은 분명했지만, 토마스는 그 말보다 그녀의 눈빛과 행동, 함께한 시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착각이다. 말보다 감정이, 진실보다 환상이 더 크게 들릴 때.

이 영화를 보며 내 과거도 떠올랐다. 나 역시 누군가를 짝사랑한 적이 있다. 아니, 그때 나는 우리가 ‘사귀는 중’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서머의 입장이었을 그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너랑 있는 건 편하지만, 우린 친구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부정했다. 마음속에서 자꾸 ‘언젠가는 바뀔 거야’, ‘날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같은 희망을 키웠다. 그건 희망이 아니라 자기기만이었다는 걸,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500일의 썸머는 연애의 시작부터 끝까지,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토마스가 썸머와의 관계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똑같은 하루가 처음에는 로맨틱하게, 그리고 나중에는 서늘하게 변해가는 걸 본다. 같은 장소, 같은 대사, 같은 음악이지만 감정은 전혀 다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장소도, 추억도 모두 재해석된다. 그가 다시 예전의 그 카페에 앉아 썸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결국 사랑은 기억 속에만 남는다는 씁쓸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상처받은 사람’이 끝내 성장한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썸머를 잊지 못해 무너졌고, 방황했고, 꿈꾸던 건축가라는 길도 외면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현실을 마주하고, 자신의 길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썸머를 붙잡지 않고, 놓아주고, 그 시간들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간다.

토마스에게 썸머는 인생의 전부였지만, 사실 그것은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우리도 때때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며 그 사람이 내 인생 전체를 뒤흔든다고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 사람은 내 삶의 일부였을 뿐, 전부가 아니었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토마스는 새로운 사람, ‘가을(Autumn)’을 만난다. 계절이 바뀌듯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변화한다. 사랑은 끝나지만, 삶은 계속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말이 다정하게 마음에 내려앉는다.

500일의 썸머는 사랑이 항상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이별이 끝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 사랑은 끝났지만, 당신의 계절은 계속된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에게도 다시 가을이 찾아올 것이다.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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