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물결, 잊힌 기척
그날 밤은 이상하게도 깊었다.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소녀는 이불속에서 뒤척이기만 했다.
창문 밖으로는 달이 떠 있었고,
은은한 바람이 커튼을 밀어 안으로 스며들었다.
소녀의 마음은 자꾸만 연초꽃이 흩날리던 그 꿈속으로 돌아갔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안아주던 그 아이.
익숙한 눈빛, 따스했던 손길.
그 품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지는 공간이었다.
소녀는 문득
‘그게 진짜 꿈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소녀는
이불을 정리하려다
무언가가 발등에 닿는 낯선 감각에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바닥 위에 놓인 귀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분홍빛과 은빛이 엷게 섞인,
꽃잎처럼 섬세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짝이 없이 홀로 남겨진 귀걸이.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얇고 찬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햇살이 비치자 그 표면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빛이 꿈속 연초꽃의 빛과 겹쳐 보였다.
그 순간, 어젯밤 꾸었던 꿈의 장면이
조각조각 되살아났다.
“나는 너야.”
“이제는 내가 너를 안아줄게.”
그리고 연초꽃이 하늘로 흩날리던 순간,
누군가의 손끝이 소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던 기억.
그 감촉이 지금 귀걸이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소녀는 손 안의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뒷면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Y.’
손으로 몇 번이고 문질렀지만,
그 이니셜은 사라지지 않았다.
Y... 누구일까.
‘윤다율?’
아니면… ‘Yourself’?
소녀는 문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그날 오후,
소녀는 새엄마와 언니가 집을 비운 틈을 타
혼자 창고를 정리했다.
한참을 박스 속을 들추다
오래된 거울 하나를 발견했다.
표면은 먼지투성이였지만,
소녀는 바닥에 앉아 조심스럽게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았다.
그리고 그 거울 앞에 섰다.
잠시 망설이다
귀에 그 꽃잎 귀걸이를 껴보았다.
작은 귀걸이는 마치
처음부터 그녀의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거울 속의 소녀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달라 보였다.
어딘가 눈이 반짝였고,
입술은 말하지 않아도 다정했다.
소녀는 거울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를 안아준 것처럼,
나도 이제 나를 안아줄 수 있어.”
해 질 녘,
소녀는 침대맡 상자에 귀걸이를 넣으며
생각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있다.
누구도 보지 못했고,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작은 물결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소녀는 그날,
창문을 열고 호숫가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바람 따라 흔들리는 달맞이꽃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 안엔 분명
무언가가 머물다 간 흔적이 있었다.
소녀는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손에 쥐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마디 속삭였다.
“나 여기 있어.
그냥 혼자가 아니라,
나를 만난 나로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