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mer의 ‘Sailing’에 몸을 맡긴 저녁

조용한 위로, 조용한 바다

by Helia

플레이리스트의 스무 곡쯤을 지나 마침내 흐른 곡. 낯익은 멜로디가 나른한 저녁 공기 위로 흘러나왔다. Rumer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금은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아련한 질감이 있다.

“Sailing takes me away to where I’ve always heard it could be...”

이 첫 소절이 나올 때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출항을 준비한다. 이 노래는 실제 바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망치고 싶고, 떠나고 싶고, 잠시 현실이라는 갑판에서 내려 쉬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그 ‘떠남’이란 단어에 약하다. 머무름보다 떠남에 더 오래 마음을 두고, 잡아두기보다 놓아주기를 더 쉽게 믿는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는 매번,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구체적인 장소는 없다. 단지 그곳은, 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다. 모든 소음이 잠잠해지고, 모든 짐이 가벼워지는 지점.

Rumer의 ‘Sailing’은 Christopher Cross의 원곡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보다는 물결에 가깝다. 때론 슬픈 듯하고, 때론 희망에 가득 차 있고, 무엇보다 한없이 조용하다.

그 조용함이 좋다. 요란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고, 나를 휘어잡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앉아주는 음악.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주는 음악.

사람이 견디기 가장 어려운 순간은 혼자라는 걸 너무 선명하게 자각할 때다. 무수한 말들 속에서도 외롭고, 불 꺼진 방 안에서 스스로를 다독일 언어조차 찾지 못할 때. 그럴 때, 이 노래는 마치 잊고 있던 이불처럼 조용히 덮어준다. “괜찮아, 너 지금 떠나도 돼.”라고. “마음만이라도 잠시, 너의 바다로 항해하자.”라고.

‘Sailing’은 내게 위로를 주기보다, 휴식을 허락해 주는 노래다. 위로조차 버거운 날들이 있다. 애써 견디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는 때때로 더 큰 부담이 되기도 하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배를 띄워주고, 노를 저어주고, 멀리 흐르게 놔두는 것. 이 노래는 그렇게 나를 바다 위로 밀어준다.

그래서 이 곡은 내 플레이리스트에 항상 자리한다. “My Playlist”라는 이름을 붙인 그 조용한 바다 한편에,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작은 배처럼. 고요한 저녁이면 슬그머니 눌러듣는다. 눈을 감고, 그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마음을 띄운다.

때로는, 삶이란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엉망이고, 너무 멀리서 보면 허무하다. 그래서 중간 어딘가, 적당한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항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숨이다. 피하지 않기 위한 준비.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잠시의 멈춤.

그렇게 Rumer의 목소리는 오늘도 나를 데려간다.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해변 끝, 나 자신이 파도처럼 숨 쉬는 조용한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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