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되어주기로 한 순간
그날은 유난히 조용한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우산을 바삐 펴고 뛰듯 걸었지만, 나는 일부러 비에 젖었다.
어디에도 닿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걷고 있었다.
익숙한 길, 익숙한 풍경, 그런데도 그날의 공기는 낯설 만큼 서늘하고 무거웠다.
마치 내가 나를 찾아가는 길처럼, 발걸음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알았다.
늘 괜찮은 척, 바쁜 척, 웃는 척을 하느라 진짜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빗방울이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리고, 차가운 물이 발등을 적시는 그 순간에야
모든 껍데기가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도망치듯 달아났던 감정들이, 그날따라 내 옆을 바짝 따라붙었다.
나는 버스정류장 앞에 서서, 멍하니 흠뻑 젖은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비친 얼굴은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지쳐 있었고, 무표정했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말을 걸지도,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그저 그 얼굴을 지켜보았다.
이게 지금의 나는구나.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척하느라 얼마나 아팠는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삼켰던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그때 처음 솔직하게 인정했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그만 참아도 돼.”
아무도 하지 않던 말을, 스스로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주 조용히 무너졌다.
눈물이 아닌, 숨소리로.
슬픔이 아닌, 다정함으로.
그날 나는 비에 젖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로 여전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생각하며, 천천히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괜찮아, 나."
“이제 네 편이 되어줄게.”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릴 줄 몰랐다.
비 오는 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린 것도, 누구를 그리워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만나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빗속에서
나는 오래 잊고 있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던 내가, 비로소 나를 바라봐 주었다.
조용하고, 조금 쓸쓸하고, 어딘가 아팠던 그날.
나는 비로소 나와 손을 맞잡았다.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하루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다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