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memories choose to rest

너는 여기 있었구나

by Helia

기억은 우리가 원하는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잊고 싶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소중하다고 해서 오래 남는 것도 아니다.
기억은 마치 제 마음대로 길을 걸어 다니는 손님처럼, 예고 없이 다가와 제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어떤 날, 어떤 장소에 조용히 앉아 우리를 기다린다.

나는 그걸 가장 평범한 순간에 느꼈다.
버려진 공책을 정리하다가, 한 장의 메모를 발견했을 때.
오래전에 누군가 건넸던 짧은 메모. "오늘도 고생했어."
볼펜 자국은 흐릿했고, 종이는 살짝 노랗게 바랬지만 그 문장은 너무 선명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그 말 한마디가 필요해서 울었는지,
그 말이 없어서 스스로를 다그쳤는지.
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담겨 돌아왔다.

기억은 그렇게, 낯선 듯 익숙한 장면에 숨어 있다.
익숙한 음악, 오래된 냄새, 특정한 햇살의 기울기,
비 오는 날의 공기, 그리고 아주 조용한 마음.

가끔은 무심코 지나쳤던 길모퉁이에서,
어릴 적 친구와 놀던 계단 앞에서,
누군가와 헤어졌던 골목에서
기억은 나를 멈춰 세운다.
그리고 속삭인다.
"여기야. 나는 여기 있었어."

기억이 쉬어가는 그 자리는
반드시 슬프거나 눈물겨운 건 아니다.
때론 따뜻하고, 때론 웃음이 나고,
때론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그 기억이 내 안에서 아직 쉬고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것들을 놓치고, 버리고, 또 떠나보낸다.
하지만 기억은 그중 어떤 것들을 골라
‘머무를 자리’를 정한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우리 곁에 남아
어느 날 문득, 우리가 다시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잠시 멈춰 숨 고를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기억이 머무는 곳은, 때론 장소가 아니라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말투, 체온, 눈빛, 나를 부르던 목소리.
그런 사람을 마주쳤을 때, 잊고 지낸 감정들이 깨어나는 것처럼
기억도 조용히 고개를 든다.
"기억나?" 하고.

나는 이제 기억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또 억지로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기억은 그저 그 기억이 쉬고 싶은 자리에 놓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날 땐,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래, 너 여기 있었구나."

기억은 살아 있는 무언가처럼,
스스로의 자리를 정하고, 스스로를 지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곁을 걷는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억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 가장 조용한 구석에
누군가가 내게 건넨 웃음 하나, 문득 마주친 눈빛 하나도
또 다른 기억이 되어 나와 함께 머물겠지.
그때 나는 아주 조용히, 그 기억을 안아줄 것이다.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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