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니어도 충분했던 순간들
언젠가 누군가가 물었다.
“남사친이 진짜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어떤 확신에 대한 반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질문 속에는 이미 어떤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친구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결국 언젠가 감정은 뒤섞이고, 복잡해지고, 깨지고야 만다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내 인생의 여백을 메워준, 한때 혹은 지금도 곁에 있는 '남사친'들. 우리는 영화도 보고, 고민도 나누고, 밤샘 수다도 떨었다. 그 속엔 설렘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은 ‘믿음’이었다. 내게 남사친의 존재 이유는, 설렘의 가능성보다 신뢰의 지속성에 있었다.
---
경계 없는 대화의 가능성
남사친은 때로 여자 친구들과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또 말하게 해 준다. 여성들끼리의 공감은 분명 위로가 되지만, 때로는 같은 관점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남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어.”
이런 말들이 남사친의 입에서 나올 때, 나는 세상이 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내 입장에서만 보던 일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되고, 그 시야가 삶의 결을 더 깊게 만든다.
남사친은 나에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이성의 행동을 설명해 주는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 배우게 된다. 사람은 꼭 같을 필요는 없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거리까지는 다가갈 수 있다는 걸.
---
사랑과 우정 사이, 존재의 무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혹시 걔랑 썸 탔었어?”
“너무 자주 만나는데, 사귀는 거 아냐?”
그럴 때마다 설명이 곤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로맨스의 흔적도 없이, 서로의 인생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내가 이 사람에게 이성적 감정을 품지 않는 게 이상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친구다. 그 어떤 감정도 숨기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감정을 놓아도 되는 사이.
그 존재는 편안하고 단단하며, 약간은 쓸쓸하기도 하다.
혹자는 말한다. “남사친은 결국 잠재적인 연애 후보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인생의 어떤 관계는, 연애라는 그릇에 담기엔 너무 벅차고도 고귀하다는 것을. 어떤 사이는,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남사친의 존재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성별’이라는 렌즈 없이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성별의 경계를 전제한 채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상대를 ‘여자’나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닐까.
남사친이라는 개념은 그 경계에 질문을 던진다. ‘성별은 관계에 반드시 영향을 주는가?’라고.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경험으로 답하게 된다.
누군가는 실패하고, 누군가는 서툴렀고, 누군가는 무너졌지만—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 경계 위를 걷고 있다.
그 경계 위에서 나는 생각한다. 성별은 다르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같은 고독 속에 있고,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 남사친은 그 ‘사람’의 얼굴을 한 친구다.
---
함께 울 수 있는 사람
기억나는 밤이 있다.
취업에 떨어지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눈물이 날 때. 그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럼 나갈래?”라고 말했다.
추운 밤, 따뜻한 가락국수 한 그릇을 함께 먹으며 나는 흐느꼈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위로가 말보다 묵음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음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안다. 남사친의 진짜 존재 이유는, 바로 그런 순간에 있다.
내가 사람으로서 부서지고 있을 때, 말없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누군가.
그는 이성 이전에, 진심으로 내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친구였다.
---
썸이 아닌 진심으로
요즘 세상은 모든 관계를 ‘썸’으로 정의하려 든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냐’는 질문은, 어쩌면 진짜 인간관계에 대한 무례일지도 모른다.
왜 모든 관계가 ‘연애의 가능성’을 담보해야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가?
왜 모든 친밀감에 감정의 전조를 읽어야 하는가?
진짜 우정이란, 가능성보다는 ‘지속성’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는 썸이 아니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우정을 택하기도 한다.
그는 내게 그런 친구다.
지금 연애하지 않아도, 나중에 결혼하지 않아도,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10년 뒤에도 어색하지 않을 관계.
그런 사람,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그 흔치 않은 관계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쩌면 ‘남사친’ 일 것이다.
---
남사친은 ‘나를 이해하는 이성’이라는 가능성
여기에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존재가 전적으로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복잡한 마음과 생각을,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읽어주는 순간에 감동한다.
그게 이성이라면?
우정과 호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선을 지키기로 선택하는 사람들,
그 모호함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관계를 택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드는 우정은 조금 더 단단하고, 아름답다.
남사친은 그런 관계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니어도, 이해받을 수 있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
그 존재는 ‘사랑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어떤 것’ 일 수 있다.
---
결론, 남사친이 존재하는 이유
남사친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이에게는 위로이고,
어떤 이에게는 경계이며,
어떤 이에게는 실패한 사랑이거나,
또 어떤 이에게는 가장 오랫동안 남을 우정이다.
그리고 나에게 그는,
**‘함께 성장하는 동행’**이다.
때로는 내 말에 반박하고,
때로는 내 감정을 흔들고,
때로는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
그 존재는 내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를 함께 채우고 있다.
설명할 수 없어도, 사라질 수는 없는 관계.
이름은 ‘남사친’이지만,
그 본질은 ‘진짜 친구’다.
그러니, 남사친은 존재한다.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존재할 수 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충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