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이유도 없이 마음이 먼저 반응할 때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Après un rêve (꿈꾸고 난 뒤)》
꿈에서 깬 아침,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귓가를 스친다. Gabriel Fauré의 "Après un rêve(꿈꾸고 난 뒤)"는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한 줄기 그리움 같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본 적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인데 마치 전생에서 한 번은 꼭 만났던 사람처럼 익숙한 어떤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은 형체가 없지만 감정은 선명하다. 이 곡은 그 감정의 실체를 은근하게 건드린다.
한때, 그런 사람이 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전혀 내 타입도 아니었고, 특별한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자꾸 시선이 갔다. 어쩌면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다시 만난 느낌에 가까웠다. 그 느낌은 포레의 곡처럼 조용히 다가와, 내 안에서 천천히 물을 채우듯 감정을 부풀렸다.
그 사람과는 결국 친해지지도 못했고, 마음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무겁게 남아 있다. 마치 긴 꿈을 꾸고 난 듯,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마음 한구석은 헤어짐을 겪은 것 같은 묘한 허전함.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나의 과거 어느 순간을 닮아 있었던 건지, 지금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리움은 대체 언제 생겨나는 걸까.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게 왜 마음이 쓰이는 걸까. 혹은 아직 닿지 못한 인연을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걸까. 설명할 수 없기에, 음악이 그 마음을 대신 들려주는지도 모른다. Après un rêve는 마치 전생의 한 장면을 꿈에서 되풀이하다 깨어난 이의 감정 같아서, 나처럼 잊은 줄 알았던 어떤 감정을 다시 불러낸다.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 사람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통할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이건 외로움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실은 누군가가 아니라, 그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자체를 갈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사라졌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그 사람이 남아 있다. 아마도 우리는 전생의 어디선가, 같은 계절을 지나며 나란히 걸은 적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 여기 있었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중 얼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겐 그 마음이 진짜였다. 한 번도 나누지 못한 감정,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말들.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음악을 듣는다. 포레의 선율은 마치 나를 그때 그 골목 끝으로 다시 데려가는 것 같다. 그 사람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내 시선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하던 내 마음을, 음악은 조용히 안아준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그중엔 몇몇은 아주 깊게, 오래도록 남는다. 그 사람이 꼭 내 곁에 있지 않아도, 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마음이 먼저 알아본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 이후로는 자주 꿈을 꾼다. 그 사람이 내게 남긴 감정이 꿈속에서 자꾸만 말을 거니까.
나는 아직도 꿈속에서 그를 만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 사람은 사라진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남아 있는 건 단 하나, 그리움뿐이다. 하지만 그 그리움이 나를 덜 외롭게 만든다.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길을 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은 덜 무너진다.
포레의 음악이 끝나면, 마음 한구석이 다시 적막해진다. 하지만 그 적막은 공허함이 아니라, 한 번 사랑했거나 사랑할 뻔했던 어떤 감정의 자취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자취를 따라, 다시 음악을 틀어본다. 이 그리움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꿈이 다시 찾아오길 바라며, 나는 음악을 듣는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