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늦여름의 숨결

하루의 끝자락, 잊힌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르는 저녁

by Helia

빌헬름 스텐함마르 – Late Summer Nights


햇빛이 길게 드리워지던 어느 늦여름의 저녁, 나는 무심코 창문을 열었다. 그날따라 바람은 유난히 조용했고,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에어컨을 꺼두고, 책상 위 스탠드를 끄고, 그냥 그렇게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잔잔하고, 다정하고, 조금은 지쳐 있는 듯한 바람이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기에도,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애매한 계절.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어김없이 조용해진다.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리는 듯한 감각. 그건 쓸쓸함이 아니라, 어쩌면 조용한 다정함이었다.

스텐함마르의 “Late Summer Nights”를 처음 들은 날도 그랬다. 클래식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그날은 특별히 피곤한 날도 아니었다. 다만,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무채색이었다. 구름이 흐르고 있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고, 저녁노을은 붉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그런 흐릿한 풍경 속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고, 나는 무심결에 숨을 멈췄다.

이 곡은 그 자체로 어떤 기억을 환기시키는 힘이 있다. 마치 오래전 여름방학의 끝자락, 마지막 일기를 쓰던 날. 그날도 이렇게 해가 길었고, 어스름은 천천히 스며들었다. 사라지는 계절에 대한 미련,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아쉬움. 그런 감정들이, 별안간 음악 속에 다 담겨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계절을 바꿀 때 무언가를 결심하거나, 다짐한다. 새해 첫날, 봄의 첫 벚꽃처럼 드라마틱한 전환의 순간에 마음을 정리한다. 하지만 늦여름은 다르다. 그것은 화려한 변화를 예고하는 계절이 아니라, 지나온 것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느릿한 감정이 좋았다. 무언가를 다짐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잘 있었구나'라고 계절을 쓰다듬듯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Late Summer Nights'는 제목 그대로, 여름의 끝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고요한 작별 인사에 가깝다. 요란한 굿바이가 아니라, 문득 돌아본 창가에 놓인 찻잔처럼. 말없이 다가와 다정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음악. 그래서 더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나는 이 곡을 들으며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너무 뜨거웠던 나날, 혼자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던 시간, 땀이 식지 않아 괜히 짜증 났던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걸어 다닌 산책길. 여름은 늘 벅차고 버겁지만, 돌아보면 가장 많은 기억이 남는다. 웃음도, 후회도, 약간의 후덥지근한 체온까지도.

그리고 그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이 곡을 듣는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마음이 울렁거릴 만큼. 그건 누군가와 헤어지는 기분과도 비슷하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마지막 밤, 말을 아끼게 되는 그 순간처럼. 이 음악은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 아주 깊고 잔잔하게, 오래 남는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빠르게 계절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 계절이 오기 전부터 다음 계절의 계획을 세우고,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가을 옷을 사고, 노을을 보며 사진을 찍는 것에만 바쁘고. 그렇게 살다 보면, 정작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한 해를 흘려보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음악은, 그렇게 바쁘게 지나가던 내 시간을 멈춰 세운다. 그리고 묻는다. “올여름, 넌 어떤 마음으로 살아냈니?”

나는 잠시 멈춰 앉는다. 아직도 다 지우지 못한 감정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 여름의 끝자락에 남겨진 내 마음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하나 접는다.

그저 그런 하루였지만,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고, 노을을 바라보고, 누군가의 안부를 물었던 날들. 그것이면 충분했던 여름이었다.

'Late Summer Nights'는 그런 마음을 가만히 끌어안는다. 계절이 지나가도, 음악은 남는다. 그리고 그 음악 안에는 우리가 놓치지 않았던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나는 오늘도 이 곡을 듣는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린다.

“올여름, 나 정말 잘 살아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