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어스름 저녁이 좋아? 어둑어둑해진 밤이 좋아

결국, 지금 이 순간이 좋아

by Helia

“어스름 저녁이 좋아? 아니면 어둑어둑한 밤이 좋아?”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말이 너무 예뻐서, 고르기 어려웠다.
마치 둘 다 마음에 들어 옷가게에서 서성이는 사람처럼, 나는 마음 안에서 저녁과 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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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어스름 저녁.
햇빛이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 하늘은 남색에서 회색으로, 다시 푸르스름한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 시간대에는 모든 것이 유예되는 기분이 든다.
하루의 분주함도, 밤의 고요함도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그 사이.
그래서일까. 어스름 저녁은 마치 쉼표 같기도 하다.
그저 숨을 돌리며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시간.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되는 그런 시간이다.

나는 그런 저녁이 좋다.
바람이 차지 않을 정도로 불어오고, 집집마다 하나둘 켜지는 불빛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시간.
그 시간에는 어떤 감정도 날카롭지 않다.
기쁘면 고요한 기쁨으로, 슬프면 사려 깊은 슬픔으로 남는다.
어떤 감정이든, 날 선 끝이 닳아진 채 마음 안에 고요히 자리 잡는다.

어스름한 저녁,
그 푸르스름한 시간 속에서 나는 종종 나를 마주한다.
낮 동안 쌓인 감정들을 정리하고, 하루 동안 억눌렀던 말들을 조용히 풀어내며,
내 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오늘, 많이 애썼지?"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내일은 조금 더 가볍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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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둑어둑해진 밤도 참 매력적이다.
그 어둠은 모든 것을 숨겨준다.
창문 너머의 빛들도, 골목길의 그림자도, 내 마음의 주름도.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자처럼 퍼져 있다.
그래서 밤에는 마음을 덜 부끄러워하게 된다.
낮에는 감추고 싶었던 감정들도, 밤이 되면 조심스럽게 꺼낼 수 있게 된다.
그건 마치 고백 같은 순간이다.

나는 밤을 오래 사랑해 왔다.
특히 어둑어둑한 그 시간대, 완전히 잠들기 전의 세상은 유일하게 나와 세상이 평행해지는 기분이 든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어떤 전화도 울리지 않고,
SNS의 피드도 멈춘 듯 조용하고, 거리의 소리도 고요하다.
그런 밤엔,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오롯이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어둑어둑한 밤은 나에게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다.
하루의 끝을 천천히 닫는 의식.
하루를 고이 접고, 머릿속의 온갖 소음을 꺼내고,
그 속에서 진짜 중요한 마음을 하나 골라내어 조용히 품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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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 저녁과 어둑한 밤 사이.
그 두 시간은 마치 하나의 마음속 두 가지 결이다.
어스름은 ‘들어주는’ 감정에 가깝다.
하루의 나를 조용히 안아주는 포근한 품처럼.
반면 어둑한 밤은 ‘꺼내는’ 감정이다.
감정의 조각들을 차분히 꺼내 탁자 위에 펼쳐보는 것.
그래서 나는 어쩌면, 두 시간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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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했다.
“저녁은 회복의 시간이고, 밤은 직면의 시간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나를 다독여줄 때, 나는 다음 하루를 위한 숨을 고른다.
밤이 나를 진실하게 만들 때, 나는 더 단단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아침을 새로움이라 말하지만,
나는 저녁과 밤에서 더 많은 새로움을 얻는다.
새로운 결심, 새로운 다짐, 새로운 마음.
그건 해가 지고 난 뒤에야 진짜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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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창밖을 보며 친구가 물었다.
“너는 어떤 때가 제일 좋아?”
나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푸르스름한 저녁도 좋아. 그때는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근데 어둑어둑한 밤도 좋아. 그땐 내가 진짜 나인 것 같거든.”

그 말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결국 나는 낮보다는 밤의 사람이고, 밝음보다는 어둠 속에서 자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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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푸르스름한 저녁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어둑어둑한 밤을 좋아한다.
그건 취향이자, 성향이며, 삶의 한 조각이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녁의 붉은 기운이 옅어지고, 어둠이 천천히 스며들며, 하루가 두 색깔로 물든다.
그리고 나는 둘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속삭인다.
“이 시간이 참 좋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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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다시 묻고 싶다.
“푸르스름한 어스름 저녁이 좋아? 어둑어둑해진 밤이 좋아?”

나는 대답한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숨 쉬는 지금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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