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처음 만난 건반 위에서 배운 ‘기다림의 박자'
나는 늘 손이 느렸다. 글씨도 천천히 썼고, 손끝에 힘이 없어 색칠공부도 오래 걸렸으며, 특히 건반 위에선 더 그랬다. 또래 아이들이 ‘도레미파솔’을 빠르게 오르내릴 때, 나는 ‘도’ 위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레’를 찾아가는 아이였다.
피아노를 처음 배운 건 여덟 살 무렵이었다. 다섯 살에 무언가를 배우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나는 그 대견한 아이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 손에 이끌려 간 피아노 학원은 생각보다 좁았고, 창문에는 분홍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커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그 안에서 나오는 먼지 냄새와 햇빛이 섞인 향을 기억한다.
엄마는 말했다. “한 가지는 배워야 하지 않겠니.”
그 ‘한 가지’는 피아노였다. 악보는 ‘바이엘’이었고, 내 손은 작고 뭉툭했다. 검지가 건반을 누르는 힘이 너무 약해서 소리가 작거나, 아예 나지 않기도 했다. 손가락이 유연하지 않다는 선생님의 말은 어린 나에게 작은 낙인처럼 남았다. "느려요, 얘는." 그 말 이후 나는 모든 걸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하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피아노가 좋았다.
느리게 배우는 것에도, 선생님이 한숨 쉬는 소리에도, 나는 기어코 매일 연습을 했다. 느릿느릿하지만, 끝까지 치는 것. 그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방식이었다. 누군가는 능숙하게 튀어나가는 화음을 단숨에 터뜨리지만, 나는 한 음씩 눌러야만 멜로디가 만들어졌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위로 같은 곡이 있었다.
에리크 사티(Eric Satie)의 <Je te veux(나는 당신을 원해요)>.
이 곡은 흔히 ‘왈츠’라 불리는 리듬 안에 있지만, 리듬이 일정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사티의 곡들은 늘 그렇다. 클래식 전공자도, 음악을 오래 들은 사람도 이 곡을 들으면 순간, 멈춰 서게 된다. 익숙한 듯 낯설고, 우아한 듯 슬픈 이 곡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가장자리를 자극한다.
나는 이 곡을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들었다. 자퇴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사람 많은 복도에 서 있기조차 힘들던 때, 음악실에 혼자 남아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음악실은 늘 어두웠고, 피아노는 약간 음이 나갔다. 그 건반 위에서 이 곡을 만났다.
처음엔 너무 느려서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느린 속도가 내 속도와 꼭 맞아떨어졌다. 손이 느린 나에게, 음악이 먼저 다가와 속도를 맞춰주는 느낌이었다. "너처럼 천천히 와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곡의 제목은 ‘Je te veux’ — 나는 당신을 원해요.
직역하면 지나치게 직설적인 사랑 고백이지만, 내가 들은 건 그런 고백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조용하며, 더 비밀스러운 그리움.
다 주지 못한 감정과, 아직 끝내지 못한 말들의 잔향.
나에게 이 곡은,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든 ‘천천히 건너가는 감정의 왈츠’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음악이 기다려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누군가는 속도 내지 못하는 사람을 조급하게 채근하지만, 어떤 곡은 그런 사람을 기다려준다. 사티의 피아노 곡들은 나처럼 느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끝으로 그 멜로디를 더듬었다.
악보를 보지 않아도 외울 수 있을 만큼, 수없이 반복했다.
소리는 조금씩 맑아졌고, 나도 조금씩 말간 얼굴이 되어갔다.
자퇴를 한 후에도, 나는 가끔 그 곡을 쳤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당신을 원해요’라는 제목이, 누군가를 향한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의 나를 원하는 거야.”
비록 속도가 느리더라도, 곧게 걷지 못하더라도,
조용한 방에서 멈춰 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보고 싶은 마음.
그 곡은 그렇게 내게 남았다.
실력이 아닌 감정으로, 속도가 아닌 기억으로,
나는 지금도 손끝이 느린 사람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느림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다.
사티는 내 느린 손가락에 멜로디를 안겨주었고,
나는 천천히 피아노 앞에 앉을 이유를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