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마음이 붉어지는 시간
추천곡_모차르트의 ‘String Quartet No. 15 in D minor, K. 421 – 2악장(Andante)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 전날까지도 나란히 걷는 상상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지만, 막상 그 앞에 서자 그 모든 시뮬레이션은 증발해 버렸다. 발끝이 어색하게 땅을 긁었고, 손은 자꾸 허공을 더듬었고, 목소리는 본래보다 높게 튀어 올랐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날, 나는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기다렸어?”
그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너무 일찍 와 있었고, 카페 유리창 밖으로 그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걸 세 번쯤 본 후에야 일어났던 것이다.
그날의 시간은 느릿하고 따스했다. 햇빛이 내 어깨를 따라 흘렀고, 바람은 내 머리칼을 흩뜨렸다. 모든 게 흐르듯 지나가는 오후였지만, 마음만은 들떠 있었다.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2악장처럼, 첫 도입은 조심스럽고, 마치 서로의 마음을 짚어보는 듯 느린 템포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처음 마주 앉은 테이블에서 커피잔을 마주했지만, 눈은 자주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웃었고, 말끝은 자주 흐려졌다. 어색한 순간마다 웃음으로 덮었고, 말이 겹치면 함께 웃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 웃음이 참 고맙다고 느꼈다. 웃음으로 감정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그렇게 설렐 줄은 몰랐다.
그는 길을 걸을 때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줬다. 전철역까지 이어지는 나무 그늘 길을 함께 걷던 순간, 나는 조심스럽게 손등을 내렸다. 닿을 듯 닿지 않던 그 간격은 한참 동안 그대로였고, 마치 모차르트의 두 현악 파트가 서로에게 다가가듯 간극을 좁히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추워?” 하며 묻는 말투였지만, 분명히 봤다. 그도 나처럼 떨고 있었다는 걸.
사람의 마음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다정한 말보다, 때로는 다정한 침묵이 더 설레게 만든다.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마음이 천천히 녹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첫 데이트란 그런 시간의 총합이 아닐까.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꾸 알고 싶어지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나도 모르게 내어주고 마는 마음.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확신한 건, 돌아가는 지하철 안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마음이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을 느꼈다. 전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눈꼬리는 웃고 있었고, 입가는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졌을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그날 이후, 모차르트의 K.421 2악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를 떠올린다.
그때의 오후, 가벼운 바람, 따뜻한 커피, 그리고 조심스럽던 대화들.
모든 것이 멜로디처럼 흐르다가, 중간에 갑자기 변화하는 전개처럼 설렘이 고조되던 순간들. 악장 후반의 잔잔한 흐름은 마치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쉬움마저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처음이라 모든 게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그 조심스러움이 사랑스러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이미 쓰인 멜로디를, 이제 막 알게 된 사람과 함께 연주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음 하나하나가 다르지만 결국 어우러지고, 중간중간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끝내 완성되는 하나의 곡.
모차르트는 수백 년 전 이 곡을 썼고, 나는 수십 년 후의 오늘, 그 곡을 들으며 누군가를 생각한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감정의 전이인가.
첫 데이트의 설렘은 딱 그 정도 길이다.
한 곡의 악장처럼 길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다시 재현될 수 없고, 그때 그 감정 그대로 반복될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다.
우리는 그날,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 앞에서 따뜻해졌고,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날이었다.
설렘은 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스며든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인간답고 투명하게 빛나는 때는,
누군가의 손을 처음 잡던 순간,
말없이 웃어주던 그 순간,
햇살이 눈부시던 오후 세 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