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그늘 아래

그 사람은 가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by Helia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던 오후였다.
햇빛은 따사로웠지만, 나무들이 만든 그늘은 차가웠다.
나는 그 길 아래 서 있었다.
익숙하고 낯선 그 장소,
한때 두 사람이 나란히 걷던 거리.
지금은 혼자지만,
그곳엔 여전히 ‘우리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그 노래가 흘러나오던 어느 날 이후로,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말없이 돌아서던 그 사람의,
무거운 걸음과 끝내 흘리지 않던 눈물의 마지막 장면이.

사랑이 끝나고 나면,
그 사람이 떠난 자리가 유독 눈에 밟힌다.
처음 만났던 장소,
처음 손을 잡았던 거리,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걸었던 길.

그 길엔 수많은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
봄이면 연둣빛의 시작을 알렸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가렸으며,
가을이면 낙엽 사이로 손을 맞잡았고,
겨울이면 빈 가지 사이로 고요히 어깨를 맞댔다.

그 나무들 아래를 걷던 날들이
이제는 전부 추억이 되어
그늘처럼 마음에 드리운다.

이별은 갑작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말이 줄고,
함께 있어도 핸드폰만 들여다보던 시간들,
사소한 농담에도 웃지 않게 된 날들.

그 모든 게 이별의 전조였다는 걸
우리는 알고도 모른 척했다.
어쩌면,
모른 척하면서 버티고 있었던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너는 조용히 멀어졌고,
나는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더 아플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계절로 흩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가로수 그늘 아래’로 향했다.
굳이 그 길이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골목,
약속 없이 걷던 산책로,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나눴던 웃음,
어깨를 스친 채 마주 보며 웃던 그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사람 없는 풍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그 안에 있는 나만 달라져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은 끝났는데,
기억은 왜 이리 끈질긴 걸까.

사랑할 땐 그렇게 짧았던 순간들이
떠나고 나면 왜 그렇게 오래 머무는 걸까.

지워지지 않는 장면들,
불쑥 떠오르는 대화의 조각들,
익숙한 향기,
익숙한 멜로디.

모두가 그 사람을 데려온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들이 낡지 않게
가만히 닦아주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말했다.
“이별은, 기억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기억을 지우며 살아가는 사람 사이의 거리라고.”

나는 아마도 전자다.
네가 떠난 후에도,
나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기억 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건 결코 미련이 아니라,
감정을 정리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너무 뜨거웠던 감정은
냉장고 안에 넣어둬야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서늘한 가로수 그늘 아래 보관해 두었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또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았고,
조심스러웠다.

사랑은 다시 올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이 아닌 사랑은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 아래에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시절을 품는 감정이었구나.

그러니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사람 자체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보냈던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이문세의 노래 한 곡이
이토록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을 줄 몰랐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는 그 문장 하나가
이별을, 그리움을, 나 자신까지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늘 아래 서 있다는 건,
햇빛을 잠시 피해 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직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노래처럼
한동안 그늘 아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 그늘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제는 너의 뒷모습을 찾지 않는다.
너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걷는다.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햇살은 잎 사이로 스며들며
오늘 하루를 따뜻하게 덮어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언젠가 너와 걸었던 그 속도로.
조급하지 않고,
애타지 않고,
그냥 오늘 하루를 담담하게 살아가는 걸음으로.

가로수 길 그늘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간다.

너는 떠났지만,
너와 함께한 시간은
내 안에 살아남아 있다.

그리고 그 그늘이 있었기에
나는 다시 햇빛 속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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