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여행은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문득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어디든 좋다. 낯선 거리, 처음 보는 표지판, 이름 모를 카페 간판, 무표정한 사람들의 틈.
그저 지금의 나로부터, 지금 있는 이곳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유는 많지만 동시에 이유는 없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들이 뭉쳐 있다가,
마침내 하나의 충동으로 변하는 순간.
그게 바로 나의 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왜 떠나?” 혹은 “어디로 가는 거야?”
그 질문엔 늘 대답이 망설여진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왜 떠나는지도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무언가에 깔려 죽지 않기 위해 떠나는 여정.
목표나 계획보다는 호흡과 숨이 더 중요했던 여행.
그래서 나는 ‘목적지 없는 여행’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살게 했다고 믿는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공부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며,
행복해지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인정받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우리는 결과 중심의 삶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여행만큼은 다르다.
목적이 없는 여행은 도착보다 ‘진행 중’이라는 감각이 더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어디로 향하든, 어떤 숙소에 묵든,
그 모든 것이 잠시 나에게 새로운 공기를 안겨준다.
나는 과거에 목적 있는 여행만을 했다.
촬영을 위해, 마감 일정에 맞춰, 자료 조사를 위해.
목적이 분명한 만큼 효율적인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행은 언제나 무언가를 쏟아낸 뒤 텅 빈 느낌으로 끝났다.
가끔은 몸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전혀 떠나지 못한 채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어느 겨울날, 아무런 이유 없이 떠났던 바다.
그날은 기억에 남는다.
계획도 없이 갑자기 표를 끊고, 짐도 없이 훌쩍 나선 날이었다.
도착한 해변은 조용했고,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찼다.
파도는 무심히 부서졌고,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어떤 사진도 찍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혼자만 알고 싶었던 바다였다.
돌아와 누군가가 물었다.
“가서 뭐 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무언가를 내려놓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나는 그날, 내가 짊어진 말들, 누군가의 기대, 내 안의 죄책감 같은 것들을
잠시 바다에 맡겨두고 돌아왔다.
완전히 놓아버릴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한결 가벼워진 채로.
여행은 때때로 도망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그걸 비겁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도망도 용기라고.
어떤 상황을 끊어내고, 지금의 나로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내리는 결정.
그건 두려움의 선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그런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너무 많은 말에 상처받고, 나조차 나를 믿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떠났고, 어떤 목적도 계획도 없이 방 하나 예약해 놓은 도시로 향했다.
그 도시는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지만,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위로가 되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나 역시 어떤 기억도 얽히지 않은 곳에서
나는 조금씩 다시 나를 회복해 갔다.
그렇게 느릿하게, 아주 느리게 다시 걸을 수 있었다.
모든 여행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떤 여행은 실망스럽고, 불편하고, 외롭다.
숙소는 엉망일 수 있고,
날씨는 흐릴 수 있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런 여행조차도 나중엔 웃으며 기억하게 된다.
여행이 좋은 건, 그 실패마저도 무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편 속에서도 나는 나를 관찰한다.
무엇에 예민해지는지, 어떤 순간에 감정이 올라오는지,
내 감정의 민낯이 드러나는 그 시간들이 결국 내게 많은 걸 가르쳐준다.
여행이 끝난 후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돌아와서 일상 속을 걷다 보면, 여행지에서의 감각이 문득 떠오른다.
강바람의 냄새, 벽에 붙은 빛 그림자,
골목을 걷던 발소리, 무심코 지나친 풍경들.
그 순간들 안에 있던 나의 마음이 떠오른다.
‘아, 그때 나는 살아있었구나’ 하고.
여행은 그래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나를 완전히 바꿔놓진 못하더라도,
조금은 다른 감각으로,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금 있는 이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해 준다.
여행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어떤 순간들,
바로 그 틈에서 여행은 나를 살렸다.
그래서 나는 또 여행을 꿈꾼다.
어디로든, 언제든.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라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좋다.
어딘가를 꼭 봐야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길 위에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게 오늘도 내 마음은 먼저 길을 나선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지만, 분명 나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괜찮아지기 위해,
다시 걷기 위해
나는 또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