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줄도 모르고 마시는 관계
사랑에만 유통기한이 있는 줄 알았다.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뜨거워지기도 하고, 식기도 하니까.
변해버린 마음, 식어버린 온기, 점점 줄어드는 연락과
차가워지는 말투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유통기한을 감각적으로 알아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된다.
유통기한은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간관계에도, 우정에도, 가족 사이에도
아주 조용하고도 명확하게 유통기한은 존재한다는 것을.
어릴 적에는 함께 있으면 세상이 다 가진 것 같았던 친구가 있다.
하굣길에 함께 걷던 골목, 밤새 수다 떨던 통화,
졸업 앨범을 넘기며 그 시절을 추억할 때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났던 사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끊겼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빴고, 피곤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이제는 상대의 생일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별이 없었다.
명확한 마침표도 없었다.
그냥 어느 날 문득,
서로의 삶에서 페이드 아웃 되어버렸다.
어느 날 우연히 SNS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본다.
결혼을 했네. 아이가 생겼네.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갔네.
그 모든 소식을 나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때는 ‘내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되어버린 존재.
마음 한편이 시리지만, 억지로 다시 이어보려 하진 않는다.
그 사이의 공백을 무시한 채 다시 다가가면
오히려 서로를 더 어색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
인간관계의 유통기한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딱히 상한 기색도 없고, 경고 라벨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한다.
문득 상대의 연락이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예전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고,
함께 있어도 불편함만이 남는 순간.
그건 어쩌면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관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관계가 유통기한이 있다고 믿고 싶진 않다.
그러나 유통기한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태도는
우리의 삶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든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는 상한 걸 알고 버린다.
그런데 유통기한이 지난 인간관계는,
그 상함을 자각하지 못한 채 계속 들이켜다 보면
결국 나의 마음만 상해버린다.
무엇이든 ‘때’가 있다.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억지로 붙들면 상하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야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
어떤 관계는 그렇게 끝이 나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추억으로 남는다.
지나간 인연을 탓하지 말자.
그 시절,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은
분명 우리를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을 테니까.
모든 관계를 영원히 붙들 수는 없다.
오히려 잘 떠나보내는 법을 아는 사람이
진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관계는 언제까지일까?”라는 질문보다는
“이 관계에서 나와 너는 어떤 사람이었나?”를 묻는 것이
더 진실된 방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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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이 지난 관계를 잘 놓아주는 일,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일 수 있고,
각자의 새로운 계절을 향한 이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 문득 떠오른 그 사람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도
우리 삶의 한 방식이니까.
시간은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잊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한다.
그 모든 관계가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였음을 인정한다면,
모든 유통기한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