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새벽 세 시

다시 찾아올 고요의 약속

by Helia

어느새 새벽 세 시다.
무엇을 하다 그리 되었는지도 모른 채,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깨어 있다. 창밖은 숨소리조차 없는 고요, 도심의 밤도 잠든 시간. 핸드폰 화면에 뜬 ‘03:00’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더 무겁게 마음에 내려앉는다. 잠은 오지 않고, 졸리지도 않다. 마음은 멍하니 뜬 구름 같고, 감정은 정처 없이 부유한다.

낮 동안 꾹 눌러두었던 말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켠다. 참았던 생각, 미뤄둔 감정, 모른 척 넘겼던 장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제멋대로일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어른이 되었고, 웬만한 감정쯤은 익숙하게 눌러두는 법도 알게 되었지만, 유독 이 새벽 세 시만 되면 나는 내가 아니라 어떤 기억의 잔해처럼 느껴진다.

이 시간이 되면, 떠올릴 이유도 없었던 얼굴이 스르륵 떠오른다. 끝난 대화, 멀어진 관계, 흩어진 마음들. 내가 먼저 손을 놓았는지, 잡아주지 않았는지조차 흐릿해진 오래된 장면들이 내 안에서 다시 생생하게 재생된다. 차라리 낮에는 안 떠오르던 얼굴인데, 왜 이 시간엔 꼭, 그렇게 선명한지 모르겠다.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그때 조금 더 솔직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덜 자란 채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새벽 세 시라는 시간은 나에게 가장 정직한 시간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에 숨기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 아무도 듣지 않으니 말할 수 있는 진심. 그래서 때론 이 시간이 위로 같고, 때론 고백 같고, 어떤 날은 죄책감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내 속마음이, 그 어떤 위장도 없이 그대로 떠오르는 시간.

이불속에 웅크린 채, 그냥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감정을 밀어 두고 사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낮 동안엔 그렇게 괜찮은 사람처럼 살다가,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사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걸 자꾸만 들키고 만다.

새벽 세 시의 공기엔 특유의 차가움이 있다. 그 차가움은 육체의 추위라기보다는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는 것 같다. 눈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온도, 슬픔이 조용히 침투하기에 알맞은 습도, 외로움이 번식하기에 완벽한 조도. 이 시간엔 괜스레 창문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다시 닫기도 한다. 텅 빈 마음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지만,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고요히 방 안에 깔린다.

이럴 땐 괜히 다 지난 일을 곱씹기도 한다.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사람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진작 지나간 감정들에 물음을 달고, 대답 없는 회상을 반복하며, 나 혼자서 끝나지 않는 대화를 계속한다. 그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새벽은 그렇게 시간을 더 허락해 주고, 나는 점점 더 깊은 감정의 바닥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사이, 또 한 번 깨닫는다. 나란 사람은 꽤 잘 버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견디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고, 웃으며 말하면서도 뒤돌아선 순간에야 비로소 나를 꺼내드는 사람. 누군가와 있을 땐 절대 드러내지 않는 감정들을 이렇게 홀로 있을 때에야 마주하고야 만다.

사람들은 말한다. 괜찮지 않은 날에는 그냥 자라고. 생각은 멈추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새벽 세 시를 제대로 견뎌본 적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 시간에는 억지로 자려해도 잠이 오지 않고, 억지로 생각을 접으려 해도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든다. 세상에서 가장 정적이지만, 마음만은 가장 시끄러운 시간. 새벽 세 시는 그런 시간이다.

어떤 날은 이 시간에 조용히 음악을 틀기도 한다. 멜로디가 마음을 감싼다기보단, 그저 혼자인 시간을 덜 외롭게 만들어주는 듯해서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마음도 조금씩 진정되고, 내일이라는 단어가 아주 조금씩 다가온다. 그렇게 이 시간은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버텨낸 나에게 주는 작은 포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안다. 아침이 되면 이 마음의 잔상은 사라질 것이고, 오늘 새벽에 했던 고민과 감정도 어제 일처럼 멀게 느껴질 것을. 그래서일까. 나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기록하고 싶다. 나의 가장 솔직한 순간, 가장 무방비한 얼굴, 가장 인간다운 나를 기억하고 싶어서.

그리고 이 글이 언젠가의 나에게, 혹은 같은 시간에 깨어 있는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도 지금 깨어 있다면, 이유는 달라도 마음은 비슷할지 모른다.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한 말들이, 당신 안에도 많을 테니까.

시간은 흐르고, 시계는 어느새 세 시를 지나 네 시를 향해 간다. 바깥은 아직 어둡고, 하늘은 여전히 새벽의 빛을 품고 있다. 나는 오늘도 이 시간에 무너지지도,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은 채 또 한 번의 새벽을 넘긴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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