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일

지금 이 순간, 가장 조용한 기적

by Helia

가끔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는 날들이 유독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저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부드러웠고, 바람이 내 머리칼을 스칠 때의 감촉이 낯설도록 따뜻했고, 우연히 들은 노래가 이상하게 가슴을 건드렸다. 말하자면 아주 사소하고 조용한 하루였는데, 문득 그런 날이 ‘꿈같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꿈같은 일의 정체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하지 않아도, 그래서 더 눈부신 것들.

꿈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성질이 있다. 아름답고 간절하지만, 잡을 수는 없고, 머무르지 않으며, 깨어나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꿈같았다’는 말을 할 때, 동시에 그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았던 순간에도, 너무 아파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던 시간에도 우리는 자주 이 말을 꺼낸다. “그땐 정말 꿈같았지.” 기쁨과 슬픔, 환희와 절망을 모두 품고 있는 말.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한 편의 긴 꿈과도 같다.

아주 오래전 어느 여름날이 떠오른다. 스물셋, 나는 좋아하던 사람과 한강공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 저녁을 알리는 하늘의 오렌지빛, 한 모금씩 나눠 마시던 캔맥주. 별것 없는 순간인데도, 그때 나는 확실히 느꼈다.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믿었다. 그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없고, 나는 다시는 그런 여름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날의 공기와 웃음, 어깨에 닿았던 체온은 여전히 나를 붙잡는다. 꿈이란 늘 그렇게,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게 꿈처럼 남아 있는 일이 있다. 평생 글을 쓰고 싶었지만 한 발짝도 내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쓰면 부끄럽고, 말하면 웃음을 사던 시기.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의 눈에 띄는 날이 올 거라 막연히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했다. 그런데 정말, 그날이 왔다. 누군가 내 글을 좋다고 말해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원고를 책으로 묶자고 제안했다. 내 손으로 넘기는 책장 안에, 내가 쓴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조금은 나를 안아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내가 만든 꿈이 아니라, 꿈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런 일도 세상엔 가끔 존재한다.

물론 꿈같다는 말은 기쁜 일에만 쓰이지 않는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슬픈 일에도 사람들은 이 말을 쓴다. 가장 가까운 이를 잃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감정이 마비된 채로 살았다. 주변에서 다독이는 말들도,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도, 그 어떤 것도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바랐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지만 아무리 바라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떠나보내는 것도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라는 걸. 그리움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그때의 아픔도 결국은 나를 이끌어준 하나의 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슬퍼서, 너무 아파서, 현실 같지 않았던 꿈같은 일.

요즘은 오히려 매일같이 그런 꿈같은 순간을 하나씩 새겨가고 있다. 이른 새벽 아무도 깨지 않은 골목을 걷는 일. 푸른 하늘 아래로 지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는 일. 고양이의 따뜻한 체온을 등에 기대며 조용히 책을 읽는 일.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인 음악을 만나거나, 누군가의 오래된 사연을 들으며 같이 울게 되는 일. 모두 작고 소박하지만, 내겐 충분히 특별한 하루들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와 나누지 않아도, 나만 알고 있는 꿈같은 일들이 내 안에 조용히 쌓여간다. 그것만으로도 사는 데엔 충분하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매일의 하루를 살아내는 건 어쩌면 언젠가 그 하루를 ‘꿈같았다’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너무 눈부셨던 어떤 계절. 잠시 스쳐간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 혼자 걷던 길 위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 속 노래. 그 모든 것이 나중엔 “그땐 참 좋았지”라는 문장으로 남는다. 그 문장 속에는 분명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상실도 있다.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기억을 우리는 꿈이라고 부른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떠올릴 수는 있는 것.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꿈같은 일.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있다. 창밖엔 흐린 하늘과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 누가 보면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지만, 나에겐 이것이 충분히 꿈같다. 어제는 없었고, 내일도 알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을 내가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도 흔한 하루가, 나에겐 다시 오지 않을 하루일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가장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토록 평범하고도 조용한 날에도 나는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오늘이라는 이 하루가 언젠가 내게 다시 떠오를 때, “그날은 참 꿈같았지”라고 말할 수 있기를. 어쩌면 그 말 하나를 위해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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