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는다. 그전에는 늘 곁에 있을 줄 알았고, 영원할 줄 알았고,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별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프다.
세상에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무언가가 조용히 사라져 버릴 때 우리는 그 부재를 한참이 지나서야 눈치챈다. 마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연필이 어느 날 보이지 않게 되고, 그 빈자리가 낯설게 느껴질 때까지 우리는 그 연필이 얼마나 자주 쓰였는지도 잊고 있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사라졌던 것은 어떤 마음이었다. 열다섯 즈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매일 내 옆자리에 앉았고, 나와 같은 간식을 나눠 먹으며 하교 길을 함께 걸었다. 나는 그 친구가 내게 특별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매일을 평범하게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전학을 갔다. 고작 며칠 전에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이, 갑작스레 가방을 정리하고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빈자리에는 누군가가 앉았고, 시간은 흘렀지만, 이상하게 나는 여전히 그날을 기억한다. 아, 소중한 마음은 그렇게 예고 없이 사라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잃는다. 어린 시절의 용기, 아무 계산 없이 던졌던 말들, 이유 없는 웃음들, 어두운 골목길도 겁 없이 뛰어다니던 심장. 그런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하나씩 사라진다. 대신 조심성이 생기고, 거리감이 생기고, 체념이 자리를 잡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놓아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기억도 사라진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예전에는 또렷했던 장면들이 흐릿해진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대화는 기억나는데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함께 찍은 사진을 봐야 그날의 공기가 다시 느껴진다. 추억은 자꾸 바래고, 자꾸 왜곡된다. 슬픈 건, 그 왜곡마저도 언젠가는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계도 사라진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남이 되기도 한다.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끝까지 곁에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오래 알았기 때문에, 더 빨리 멀어질 수도 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차마 다가갈 수 없어진다. 그런 사람들과는 눈빛만으로도 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잘 지내?'라는 네 글자조차 쉽지 않다. 한때는 밤새 통화하던 사이였는데, 이젠 이름조차 꺼내기 망설여진다. 그렇게 관계는 이유 없이 혹은 이유가 너무 많아서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들 중에는 시간도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찰나도, 사라지고 있다. 어제를 다시 붙잡을 수 없고, 오늘이 곧 어제가 되며, 우리는 미래라는 이름의 불확실한 공간으로 계속해서 밀려난다. 시간은 단 한 번도 우리를 기다려준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때’를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말한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그때 고백했더라면’, ‘그때 더 노력했더라면’. 하지만 모든 그때는 이미 사라졌다. 우리 손에 남은 건 후회뿐이다.
감정도 사라진다. 한때는 그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뛰었고, 손끝이 떨리고, 이름만 들어도 귀가 빨개졌는데,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그토록 뜨겁던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조용해질 수 있을까. 사랑은 그렇게, 불이 꺼지듯 사라지기도 한다. 반대로, 한때는 미워 죽겠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증오도, 슬픔도, 분노도 언젠가는 흐려진다. 그래서 감정이란 결국,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절도 사라진다. 벚꽃이 필 때는 설레지만, 그 시기를 놓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가을은 늘 너무 짧다. 겨울은 길고 지루하지만, 막상 사라지고 나면 그 나름의 온기와 풍경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현재의 계절을 보내고, 그다음 계절이 오면 또 그전 계절을 그리워한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똑같은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과 다르고, 내년의 여름은 올해의 여름과 다르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을 스치고 사라진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더 사랑하게 되고, 더 아파하고, 더 진심을 담게 된다. 만약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애틋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매일의 풍경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려 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순간에도, 고양이가 창가에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도, 우연히 마주친 하늘의 색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멀어지고, 잊히고,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힘껏 살아낼 수 있게 해 주니까.
사라지는 것들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온기를 기억하기로 했다. 내가 잃은 만큼,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더 또렷이 보이니까.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진다. 사라지는 것이 반드시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려면, 반드시 어떤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한다.
안녕, 지나간 것들. 안녕, 사라지는 것들.
너희 덕분에 나는 지금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