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굳어버리는 손끝처럼
가끔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그냥 가만히 눈을 감고 싶은 날이 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도,
생각만은 쉼 없이 흘러든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생각은 더 선명해지고, 더 요란해진다.
비우고 싶은 마음조차도 결국 또 하나의 생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요가 선생님은 수업을 마칠 때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자, 이제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보세요.”
나는 눈을 감고 그대로 누운 채, 작게 웃는다.
‘하얗게 비운다’는 게 대체 뭘까.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
누군가의 표정, 스쳐간 말 한마디,
내가 한 실수, 하지 못한 말,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할 일 목록까지.
모두가 내 머릿속에서 도망가지 못한 채
꼼꼼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나도 안다. 생각을 멈추고 싶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러나 생각은 물처럼 스며든다.
문을 닫으려 하면 창문 틈으로 들어오고,
창문을 막으면 바닥 틈새로 기어들어온다.
멈추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흘러든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을 비우는 대신, 글을 쓰는 것이다.
발표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게 글을 쓰는 일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루틴이 되었고,
쓰지 않으면 마음이 가시를 돋운다.
입안이 말라붙고,
손 마디마디가 굳어버리는 기분.
종일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각이 글로 흘러나오지 못하면,
나는 나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글쓰기는 해방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해방이라기보다는,
나는 내 감정을 ‘적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각들이 머릿속에만 갇히지 않게
조용히 손끝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글은 내 마음의 배수구 같은 존재다.
생각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빙빙 돌다가,
결국 글로 흘러들어 갈 때 비로소 정리가 된다.
어떤 날은 단 한 문장을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다 썼다고 생각했던 글을 다시 다 지우고,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도 좋다.
그 고요한 몰입 속에서
나는 비로소 ‘생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글을 쓰며 나는 생각과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이 가지만,
그 가까움이 나를 무너지게 하지 않는다.
생각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어딘가 그 바깥에서 나를 지켜보는 느낌.
그게 글을 쓰는 순간이 주는 작은 마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을 비워라’, ‘생각을 없애라’고 말하지만,
그건 생각을 하는 사람에겐 차라리 고문이다.
나는 이제 알게 됐다.
생각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억지로 쫓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구름처럼 두는 것.
떠오르면 ‘그래, 왔구나’ 하고 인사하고,
잠시 머물다 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생각은,
붙잡을 때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
사실, 나를 괴롭히는 건 생각 자체가 아니라
그 생각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내 마음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지?’
‘이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이런 자책의 반복.
그게 생각보다 더 무겁다.
그래서 글을 쓴다.
조금이라도 나를 풀어주기 위해,
나를 가두지 않기 위해.
비우지 못한 날이 있다.
하루 종일 머릿속이 복잡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으며,
글조차 잘 써지지 않는 날.
그럴 때면 나는 문득 깨닫는다.
“아, 오늘 나는 나를 붙들고 있었구나.”
비우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날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일기장을 펼친다.
어떤 의무도 두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다.
의외로 그런 글들이
가장 나를 닮아 있다.
생각을 비우기가 참,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안다.
비우지 못한 날에도,
흘려보내지 못한 날에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였다.
그리고 그 하루를,
다시 이렇게 글로 기록하는 지금—
나는 또 조금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