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인연일까요? 악연일까요?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 그 말이 처음엔 낭만적으로 들렸다. 아무 의미 없는 우연도 의미를 부여하면 인연이 되는구나, 싶었다. 지하철 안에서 무심코 마주친 사람, 시장 골목에서 어깨를 툭 부딪친 누군가, 길을 걷다 눈이 마주친 이름 모를 얼굴… 그 모든 만남조차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부담스럽게 들렸다. 모든 스침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인 감정들이 나를 덮쳐올 것 같았다. 상처마저 인연이라 불러야 한다면, 내가 놓아야 할 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였을까.
우린 인연일까요? 아니면, 악연일까요?
처음 너를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어쩌면 몇 초만 빨리 걸었다면, 어쩌면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말 대신 미소로만 답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모든 건 정말 ‘스침’이었다. 우연 같았던 한 걸음이 인연이 되어버린 순간. 그렇게 너는 내 일상에 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너를 받아들였다.
처음엔 좋았다. 웃음이 많았고, 말도 잘 통했다. 비 오는 날 창문에 맺힌 빗방울처럼, 조용히 스며드는 다정함이 있었다. 가끔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다투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정이라 생각했다. 인연은 그런 게 아닐까, 부족한 채로 마주하고도 품어주는 것. 그래서 그때는 믿었다. 우린 인연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스침이 상처로 변해갔다. 무심코 던진 말이 칼날이 되어 되돌아오고, 따뜻하던 눈빛은 점점 식어갔다.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안도감은 이기심으로 바뀌었고, 조심성이 사라진 자리에 무관심이 자리 잡았다.
그제야 나는 묻기 시작했다. 우린 진짜 인연이었을까? 아니면, 악연을 인연이라 착각한 걸까?
어쩌면, 인연이란 처음부터 좋기만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그 옷깃이 때론 나를 베어 피를 내기도 하니까. 그래도 나는 아직도 이왕이면 ‘좋은 인연’이기를 바란다. 기억 속에 너를 남길 거라면, 차라리 따뜻했던 순간들로 기억되고 싶다. 악연으로 남는다는 건 너무 고된 일이니까.
너와의 기억은 파편처럼 남았다. 웃음소리, 너의 말투, 겨울이 오기 전 함께 걷던 골목, 가볍게 잡았던 손의 온도… 모든 게 선명하다가도, 어떤 날은 흐릿해지고, 또 어떤 날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듯 다시 떠오른다. 그건 아마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조각들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연이란 꼭 끝까지 함께 가야만 인연인 걸까? 아니면, 잠시라도 삶을 스쳐갔던 모든 이들을 인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너는 분명 나의 인연이었다. 짧든 길든, 좋든 나쁘든, 내 시간 속에 머물렀던 사람.
나는 그동안 많은 이들과 스쳐왔다. 어떤 이들은 내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또 어떤 이들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무언가를 남겼다. 배움이든, 슬픔이든, 위로든, 후회든. 그래서 이제는 안다. 모든 인연은 나를 만들어가는 퍼즐 한 조각이라는 것을.
혹자는 말한다. 인연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포장하지 말라고. 때로는 인연이 아닌 실수도 있고, 오해도 있고, 후회도 있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말이 좋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그 말. 그 말 안에는 따뜻한 운명이 숨어 있고, 놓쳐버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조용한 작별의 손짓도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떠난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우리 인연이었어. 좋은 시간이었어.” 그리고 그렇게 덤덤하게, 조금은 쓸쓸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악연’이라는 말로 서로를 찌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지금, 문득 네가 그리워진다. 문득이라는 말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감정. 어쩌면 인연은 그런 게 아닐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살아 있는 감정. 닫힌 문 같았는데, 어느 틈으로 스며드는 그리움. 너와 나는, 서로의 마음에 작은 스침을 남긴 사람들. 그리고 그 스침이 지금도 나를 흔들고 있다면, 그건 분명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연은 미련이 아니고, 그리움은 약함이 아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건, 내가 여전히 그 사람을 통해 배우고 있다는 증거다. 그 사람이 남긴 감정은, 내가 얼마나 깊이 사랑했고,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니 나는, 너와의 인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완전하지 않았더라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는 잠깐이라도 서로의 삶에 머물렀다.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고, 함께 걸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인연을 조용히 접어 마음의 서랍 한편에 넣어두려 한다. 오래도록 꺼내보진 않겠지만, 어쩌다 그 서랍을 열게 되면, 그때도 나는 말할 것이다.
“참, 따뜻한 인연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