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그리움은 젖는다

도깨비의 눈물인가, 내 마음의 흔적일까

by Helia

비가 내린다.
어제도, 오늘도.
잊을 만하면 또 내리는 비처럼, 마음속에 오래전 묻어둔 그리움도 그렇게 되살아난다. 마치 내리는 이 비가, 나만을 위해 시작된 것처럼.

어젯밤, 창문 너머로 들려오던 빗소리에 문득 잠이 깨었다. 한동안 그대 로비 오는 날, 그리움은 젖는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우는 건 하늘인데, 왜 나는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까.
비는 무엇을 데려오고, 또 무엇을 데려가는 걸까.

도깨비의 눈물일까.
사랑하는 이를 놓아주고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인간 세상 어귀에 머무는 도깨비처럼. 그가 앉아 있던 돌담 아래, 들켜선 안 되는 마음 하나가 비가 되어 뚝, 뚝 떨어진다면.

내 마음속에도 하나쯤은 그런 돌담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줄 알았던 어떤 이름.
말하지 못한 사랑은 늘, 계절을 비켜 그 자리에 머문다. 비처럼, 잊을 만하면 다시 오는 것이다.

지나간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가는 습관이 된다.
그 이름을 말하지 않게 되는 건 쉽지만,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보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런가.
비 오는 날이면 유독 그 사람이 생각난다.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던 오후, 우스꽝스러울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내 앞에 우산을 들고 나타났던 얼굴.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를 놓고 서로 뜨거운 국물을 조심스럽게 나눠먹던 밤.
괜찮다는 말속에 담겨 있던 서운함도, 짧은 침묵 끝에 마주 본 눈빛도, 지금까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이토록 선명하게 비와 함께 되살아나다니.

어떤 날은 그 사람의 얼굴이 흐릿해졌다고 안도하다가,
어떤 날은 그 이름 하나에도 무너지듯 앓는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모두 다 괜찮아진다더니, 그 말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리움은 여전히 현재형이니까.

비 오는 날이면 사람들은 우산을 챙기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흠뻑 젖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우산도 접고, 모자도 벗고,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걷는다.
마치 그리움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어쩌면 그리움은 젖어야 더 진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른 기억 위에 내리는 비처럼, 무심코 건드린 감정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처럼.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
완전히 떠나간 것이 아니라, 다만 말없이 숨어 있는 것뿐.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걷는다.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혹시 그가, 다른 시간 속에서라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 역시 비 오는 날,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치면, 그 사람이 스쳐 간 것만 같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리면, 마치 그의 손길인 양 눈을 감는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 머물다 사라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이 되어 살아간다는 건, 때로는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잊히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한 사람의 기억 속, 비 오는 날마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절을 붙잡고 있는 일은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이 순간만큼은,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당신이 있었고, 나도 조금은 따뜻했던 그때로.

사랑은 끝났지만, 기억은 여전히 젖고 있다.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그리움이 마음에 스며든다.
나는 오늘도 그 이름 하나로, 조용히 젖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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