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닌 너를 사랑했던 시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의 너는, 말없이 다정했고, 눈빛 하나로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토록 조용히 망가졌고, 너는 아무 말 없이 멀어졌으며, 나는 끝끝내 혼자 남아 그 자리를 맴돌았다.
망상의 시작은 너였어.
아주 사소한 너의 눈짓 하나에, 짧은 메시지 하나에, 나는 '혹시'를 붙이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좋아하는 걸까, 혹시 나만 특별하게 대하는 걸까.
혹시, 우리 사이에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닐까.
그 ‘혹시’들이 불어나면서, 내 감정은 현실보다 앞서 달렸다.
아무도 없는 들판을 질주하듯, 네가 닿지도 않았던 곳에 내 마음이 먼저 서 있었다.
실체도 없는 너의 마음을 그려내고, 정해진 적 없는 약속을 스스로 세우고,
네가 내게 걸어오지도 않았는데도
나는 네가 내게로 오는 중이라 믿었다.
너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지만,
나는 네가 말하지 않은 말들로도 상처를 받았고, 기뻤고, 설렜고, 무너졌어.
왜냐고?
그 말들이 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야.
그렇지, 이건 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망상이었고, 환상이었고,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내가 느낀 진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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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너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기다렸어.
배터리 3% 남은 폰을 쥐고, 알림이 뜨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친구의 광고, 혹은 앱의 공지.
그리고 간혹 너의 무심한 “뭐 해?”
그 한마디에 나는 세상의 모든 의미를 붙였다.
그건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고, 관심이었으며, 그리움이었고, 사랑의 서툰 표현이었어.
물론 나 혼자만의 해석으로 가득한.
너는 내게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벌써 우리 둘만의 미래를 상상했다.
같이 걷는 골목, 네가 좋아하던 커피의 맛, 영화관 좌석에 나란히 앉은 그림.
우리가 함께 할 계절들을 미리 꺼내어 음미하고, 저장하고, 상상하고,
심지어 싸우고, 화해하기까지 했어.
네가 없는 이 상상의 세계에서.
이야기 속의 너는, 언제나 나를 향하고 있었어.
그래서 현실의 네가 조금만 무심하면 나는 무너졌지.
왜 상상의 너와 다르냐고, 왜 그 다정한 눈빛을 나만 보지 않느냐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너를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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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작은 외로움이었어.
네가 나의 외로움의 틈을 살짝 열어줬고,
나는 그 틈으로 감정을 부풀렸다.
내가 좋아했던 건 너였을까,
아니면 너라는 이름을 입은 내 욕망이었을까.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자신이 자랑스러웠고,
그 감정을 간직하고 사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마치, 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모두 시인이라도 된 듯이.
사소한 것에도 눈물을 흘리고,
혼자 앓는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갔지.
그러나 그건 사랑이 아니라 ‘망상’이었다는 걸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인정하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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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모든 반응은 평범했을 뿐인데,
나는 그 평범함 속에서 기적을 찾으려 했다.
너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웃었고,
누구에게나 그 정도의 다정함은 가졌는데,
나는 그걸 ‘특별함’으로 왜곡했다.
너는 나를 원하지 않았어.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래서 너의 ‘무관심’을 ‘밀당’이라 부르고,
너의 ‘거리’를 ‘두근거림’이라 착각했지.
망상은 그렇게 현실을 왜곡하는 거야.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보이게 하고,
없는 것조차 있다고 믿게 만들어.
너는 그냥 지나간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너를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라 여겼고,
그래서 너의 부재를 비극처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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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그 모든 ‘시작’이 ‘끝’과 동시에 존재했다는 걸.
너를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나를 잃어갔고,
너는 내 안에서 허구가 되어갔지.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나를 생각해.
그리고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왜 그렇게 아프도록 사랑했을까?”
아니, 사랑했다고 믿었던 그 감정이
정말 사랑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너를 통해 나를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몰라.
사랑을 주는 나, 기다리는 나, 아파하는 나.
그 모든 감정의 중심에서
실은 내가 가장 나를 안아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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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너를 그리워하지 않아.
다만, 너를 통해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단 사실만을 기억해.
망상은 끝났다.
너라는 시작으로부터 태어난
수많은 기대와 환상과 상처는 이제 모두,
내 안에서 사그라들었다.
이젠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고 있어.
더 이상 누구의 눈빛에 의미를 붙이지 않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를 걸지 않아.
망상의 시작은 너였지만,
현실로 돌아온 나는,
더 이상 너로 인해 흔들리지 않아.
나는 다시 나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