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를 닮은 그리움

지워지지 않는 흉터

by Helia

다온은 문득 깨달았다.
이현을 향한 그리움이, 이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움은 시간을 따라 흐르지 않았다.
그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숙이,
조용한 숨결처럼 그녀 안에 녹아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무언가처럼.

예전에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들이 따로 있었다.
사진을 볼 때, 계절이 바뀔 때,
특정 음악을 들을 때.

하지만 이제는 그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의 잔상이 배어 있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아침에 커피를 마실 때,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창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는 거기 없었지만,
다온의 일상에 은근히 숨어 있었다.
그의 말투, 그가 자주 하던 습관,
그녀의 움직임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반짝였다.

다온은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사랑은 끝났지만,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느새
조용하고 단단한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날카롭거나 찢어지지 않았다.
대신 오래된 흉터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더는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움은 언젠가부터
자신을 닮은 감정이 되었다.
억지로 밀어낸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애써 붙잡는다고 선명해지는 것도 아닌.

그저 조용히 곁에 두고,
함께 살아가는 무엇.

거울 앞에 선 어느 날,
다온은 자신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얼굴 안에, 너도 있구나.”

그를 닮은 기억들이
표정과 말투와 걷는 속도에 스며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그를 흉내 내고 있었고,
또한 그를 닮아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현을 그리워한다는 건
그를 향해 자꾸 걸어가는 일이 아니라,
그가 남기고 간 조각들을
자신 안에 고요히 품고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온은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리움은 밀어낼수록 더 짙어졌고,
이제는 그냥 그 감정과 함께 사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를 닮은 표정,
그를 닮은 문장,
그를 닮은 생각의 방식.

그것들은 슬픔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진짜로 괜찮아지는 날이 있다면,
그건 그를 잊어서가 아니라,
그리움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온은 지금,
그를 닮은 그리움을 안고
조용히 하루를 산다.

사라지지 않지만,
무겁지도 않은 어떤 감정과 함께.

그리고 요즘,
마음에 자주 머무는 시선이 있다.

서두르지 않고,
서성이지도 않는 조용한 시선.

그건 선우였다.

말없이 건네는 커피 한 잔,
눈이 마주쳤을 때 짓는 작고 따뜻한 미소.
그는 기다렸다.
다온이 아무 말 없이도,
조금씩 나아갈 수 있도록.

예전 같았으면,
다온은 그 감정을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어떤 온기도,
그녀에게는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사라진 사랑이 남긴 공백을
어설픈 기대감으로 덮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다온은,
그 시선을 조금은 따뜻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현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조용히 곁에 있었다.
무언가를 묻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다온은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건 그리움이 끝났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리움 위에 새로운 마음이 자라고 있다는 뜻일까?”

그 물음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물음조차
조금 다정하게 느껴졌다.

예전의 다온은
그리움 속에 웅크리고만 있었지만,
지금의 다온은
그리움을 품은 채
천천히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날, 선우가 묻지도 않고
커피잔을 하나 더 사 와 탁자 위에 놓았다.

다온은 말없이 그 커피를 바라보다가
잠시 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선우는 아무 말 없이
작게 웃었다.

그 미소는 다온이 알지 못했던
안도의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기다려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그리움과는 다른 종류의 따뜻함이었다.

다온은 여전히 이현을 떠올린다.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고,
잊으려 애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리움을 안고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지금,
선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어쩌면 새로운 계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천천히 믿어보기 시작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조금씩 따뜻해지는 마음처럼
다온의 일상도 서서히 피어나는 중이다.

그리움은 여전히 그녀를 닮아 있고,
이제는 그 위에 자라는
새로운 감정 또한
그녀를 닮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리움도, 사랑도,
그 자체로 다온의 일부가 될 수 있기를.
이젠, 두려움 없이 그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