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남은 것과 사라진 것 사이

붙잡을 수 없는 손

by Helia

사라진 건 그였다.
하지만 남은 건, 다온이었다.

그의 흔적, 기억, 말끝.
그는 떠났지만,
다온은 여전히 그와의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면, 아직도 그의 글씨가 남은 쪽지 한 장이 나왔다.
“다녀올게.”
단 세 글자.
지금 봐도, 그 문장은 충격처럼 짧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사라졌다.

다온은 가끔 그런 걸 생각했다.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아픈 걸까.

사라진 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고,
SNS 계정도 사라졌고,
공통의 친구들조차 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는 삶에서 완벽히 지워진 것처럼 보였지만,
다온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선명히 존재했다.

그가 앉던 자리,
그가 웃을 때의 눈썹 곡선,
그가 낮게 부르던 이름.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온의 내면을 더욱 가득 채웠다.
사라짐은 공백이 아니라, 정체된 시간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다온은 자꾸 선우를 떠올렸다.

선우는 말이 없었다.
다온이 무너질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었다.
다온은 처음엔 그 침묵이 이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다르게 느껴졌다.
이현의 침묵은 회피였고,
선우의 침묵은 기다림이었다.

이현은 사라지는 방식으로 다온을 떠났고,
선우는 다온 곁에 머무르는 방식으로 무너진 다온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다온은 선우의 손을 잡지 못했다.
그 손끝이 너무 따뜻해서, 오히려 차가웠다.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건, 무언가를 완전히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기에.

이현의 이름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감정은 여전히 꺼내지 못한 채,
마음 한가운데 어딘가를 맴돌고 있었다.

선우는 다온을 원망하지 않았다.
한 번도 ‘기다렸다’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그녀 곁에, 묵묵히 있었다.

하지만 다온은 그 고요한 마음 앞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감정을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건,
감정을 다시 꺼내 보여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날은 이현이 그리웠고,
어떤 날은 그를 원망했다.
어떤 날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또 어떤 날은 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은 오락가락했고,
기억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다온은 자신의 감정에조차 확신이 없었다.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사이에서
다온은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햇빛이 들지 않는 새벽의 거실에서
다온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식어버린 커피 한 잔.

입술을 대보았지만,
쓴맛만이 남아 있었다.

책상 서랍을 닫으며,
다온은 문득 그 쪽지를 다시 본다.

‘다녀올게.’
그 말이 여전히 너무 잔인하게 들렸다.

떠날 때,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별을 통보하지 않은 이별은
사라진다는 방식으로 상대의 삶을 멈추게 한다.

이현은 사라졌고,
다온은 멈췄다.

지나간 사랑은 이미 떠났고,
남겨진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온은 자신이 그 중간 어딘가에 멈춰 서 있다고 느꼈다.
사라짐과 남겨짐 사이의 균열,
그 틈새에 감정을 숨긴 채 살고 있었다.

가끔은 선우의 손을 떠올렸다.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
다온은 그 손을 붙잡지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 손이 닿아 있었다.

선우에게 미안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사랑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 마음이 무르익기엔,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현의 그림자가 너무도 짙었다.

어느 날, 다온은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 걸까?”

사라진 사람에 대한 미련일까.
남겨진 기억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닐까.

때로는 둘 다였고,
어떤 날엔 그저 공허함뿐이었다.

다온은 아무 말 없이 창문을 열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하늘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 마음은 여전히 흐렸다.

마시다 만 커피,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

그것들이 탁자 위에 남아 있었다.

사라진 것은 이현이라는 사람이고,
남은 것은 그가 남긴 시간과 흔적이었다.

다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다온은 다시 살아가는 중이었다.

말을 아껴두고,
눈물을 감추고,
아직 웃지 못하더라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사이에서
조용히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다온은 아주 작게 다짐해 본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마음이 덜 아픈 날이 오기를.

사라진 것을 억지로 잊지 않아도,
남은 것에 천천히 익숙해질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익숙함이,
슬픔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는 무엇이 되기를.

달이 잠든 곳에서,
다온은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을 품은 채
아주 작고 조용한,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