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의 마음
소녀는
결국 그날 밤
종이를 펼치지 못했다.
접힌 종이는 이불 위에 올려두었고,
손은 몇 번이나 그 위를 맴돌다 멈췄다.
마치 열어버리는 순간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게 될 것처럼.
종이는 말이 없었지만
기척은 분명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자신을 향해 와 있다는 느낌.
소녀는 그 느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종이를 다시 접어
가슴 가까이에 두고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소녀는 꿈을 꾸지 않았다.
오래도록 따라오던 악몽도,
불현듯 밀려오던 기억도 없었다.
대신
처음으로
밤이 조용히 지나갔다.
**
아침은
생각보다 평온하게 시작되었다.
소녀는 알람이 울리기 전
스스로 눈을 떴고,
서두르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찬물 대신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속 자신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눈동자 어딘가가
조금 덜 움츠러든 것처럼 보였다.
그 변화가
기분 탓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소녀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
식탁은 조용했다.
새엄마는 신문을 넘기고 있었고
언니는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침묵이 숨 막히게 느껴졌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견딜 만했다.
소녀는 국을 한 숟갈 떠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침묵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
학교로 가는 길,
소녀는 우물가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연초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어제보다 한 송이 더 피어
노란빛을 더하고 있었다.
누가 보지 않아도
꽃은 피고 있었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몫의 계절을 살고 있었다.
소녀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부탁도, 다짐도 아닌
그저
인사처럼.
**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이들의 웃음,
의자 끄는 소리,
칠판을 긁는 분필 소리.
소녀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 아래,
어제 꽃을 두었던 그 자리를
본능처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꽃도,
종이도.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괜한 짓이었을까.
역시나
마음 같은 건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러나
그 자리를 조금 더 자세히 보았을 때
소녀는 멈칫했다.
바닥에
연필로 긁힌 듯한
작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급하게 무언가를 챙기다
남긴 것처럼.
그 흔적은
사라짐이 아니라
이동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
수업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고
노트 위의 글씨는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읽지 않은 종이의 감촉이
계속해서 가슴에 남아 있었다.
소녀는 생각했다.
말은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건 아니라고.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자라게 하려고
먼저 도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
쉬는 시간,
소녀는 창가로 갔다.
햇빛이 교실 안으로 길게 들어와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 빛 속에서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놀라서 피하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멈췄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소녀의 심장은
크게 뛰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확실하게
자기 박자를 찾는 느낌이었다.
**
하굣길,
소녀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혹시라도
어젯밤처럼
또 무언가가
자신을 찾아올까 봐.
하지만
길은 조용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소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꼈다.
기다림이
외로움으로 변하지 않는 순간을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집에 도착한 소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책가방을 내려놓은 뒤
서랍 앞에 앉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서랍을 열었다.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종이를 펼쳤다.
**
종이 위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서툰 글씨,
지운 흔적,
여러 번 멈췄다 이어 쓴 자국.
그 모든 망설임이
말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 꽃,
나도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놓았는지는 몰랐지만
괜히 가져가고 싶지 않아서
한참 고민하다가…
어젯밤,
돌려놓았어요.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냥…
고마웠어요.」
**
소녀는
한동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가슴 안쪽이
아프지도, 뜨겁지도 않은데
눈이 시큰해졌다.
이건
사랑도 아니고,
확신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세상에 닿았다는
작고 조용한 증거였다.
**
그날 밤,
소녀는 다시 창문 앞에 섰다.
꽃도, 종이도 없었다.
하지만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더 깊숙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달맞이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땅속 어딘가에서
분명 준비 중일 것이다.
가시는 여전히 날카롭고
세상은 여전히 쉽지 않겠지만—
소녀는
종이를 다시 접어
서랍 맨 아래에 넣었다.
그리고
속으로 분명히 말했다.
아직은
답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미루는 선택이 아니라
지키는 선택이었다.
지금의 마음을,
막 피어나려는 속도를.
소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다음 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