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적은 답장
그날 밤, 소녀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바람이 방 안을 스칠 수 있도록
작은 틈을 남겨두었다.
그렇게 창틀에 놓인 연초꽃과 접힌 종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그녀는 여전히 손에 그 온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창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꽃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손에 쥔 그것은
밤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어떤 마음이 깃들었는지
묘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일어나지도 않고 대체 뭐 하는 거야!”
새어머니의 고함이 계단 아래서 울렸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종이를 품에 안고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장작을 넣고 불을 지폈다.
솥단지를 얹고, 국을 끓이고,
이복언니의 속옷을 방울비누로 손빨래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종일 손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얘는 하도 말을 안 하니까
뭘 꾸미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복언니는 국을 뜨면서 그렇게 말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서 속으론 별별 생각 다 하겠지.
그 눈빛 봐. 찝찝하잖아.”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을 조용히 씻어 두고,
다시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 안에 담긴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아니, 마침내 마주할 용기를 내기 위해.
손끝이 천천히 종이의 접힌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 안의 글씨를 읽었다.
삐뚤한 글씨였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무언가 확실하게 살아 있는 마음이 뛰고 있었다.
> “그 꽃… 그냥 주고 싶었어.
너 그날 나 기억나?
물에 빠졌을 때, 네가 날 끌어줬잖아.
그거 진짜… 고마웠어.
그날 이후로 네가 자꾸 생각나더라.
그 연초꽃도, 너랑 어울릴 것 같아서.
혹시 불편했으면 미안.
그냥… 예뻐서. 네가, 아니 꽃이.
아, 둘 다.”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힌 듯한 기분이었다.
꽃이 아니라,
자신이 예쁘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니.
그것이 놀랍고, 이상하고,
무섭기도 하고… 조금, 따뜻했다.
소녀는 그날 하루 종일
그 쪽지를 가슴 안쪽에 품고 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솥 앞에서도,
마당에서 빨래를 널며 하늘을 바라볼 때도,
그 말들은 조용히 그녀 안에서 머물러 있었다.
“네가, 아니 꽃이.
아, 둘 다.”
그 말이 자꾸 생각났다.
그 말이, 자꾸 웃음이 났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이복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또 뭐야, 웃어? 별 일도 없으면서.”
소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입꼬리는
마음대로 내려가지 않았다.
해 질 무렵,
소녀는 장작을 패러 뒷마당으로 갔다.
해가 기울며 붉은빛이 담벼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도끼를 잠시 내려두고,
바구니 속에서 연초꽃 한 송이를 꺼냈다.
오늘은 자신이 직접 꺾은 꽃이었다.
그리고 종이를 꺼냈다.
조금 망설였지만,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손글씨로 답장을 적었다.
> “편지 잘 받았어.
기억하지.
물에 빠졌던 너,
그날 얼굴 하얗게 질렸던 거 아직도 생각나.
고맙다니, 나야말로 고마워.
꽃… 예쁘더라.
그리고, 너도.
(너처럼 반말 써봤어. 어색하네. 웃지 마.)”
그녀는 연초꽃과 종이를
어젯밤처럼 창틀 위에 올려두었다.
바람이 다녀갈 수 있도록
창문은 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소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소년,
그리고 손을 내민 자신의 모습.
하지만 이번엔,
소년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손엔 연초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 꽃은
물에 젖지도, 시들지도 않고
그녀의 품속으로 흘러들었다.
그 순간, 소녀는 알았다.
그 꽃은 이제,
자신의 마음 안에서 피어난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