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아도, 분명히 지나간 숨결이 있다
처음엔 그저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다.
물안개 낀 수면 위, 하얀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나는 그 꿈속에서 미친 듯이 할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배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 붙들어야 한다는 다급함.
하지만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날 새벽,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있고 나서야,
나는 내 안에 이상한 문이 하나 열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누구에게나 있는 문이 아니었다.
세상과 저세상 사이,
현실과 무의식 사이,
사랑과 이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문.
사주명리학에서는 그걸 ‘귀문관살’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귀문관살을 불길하다고 말하곤 한다.
죽음의 기운을 가까이 두는 별,
귀신과 교감할 수 있는 기운,
혹은 사주에 따라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 팔자’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귀문관살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감지하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건 곧,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힘이기도 했다.
내게 그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밤도,
그분은 내 꿈에 나타나셨다.
낚시를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꿈속에서 물가에 앉아 환하게 웃고 계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은 피범벅이었다.
물비린내가 아니라 피비린내.
그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된 채 깨어났고,
그날 아침,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던 작은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예지몽’이라 부른다.
어떤 사람은 ‘우연의 일치’라며 고개를 갸웃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우연이 아니라 감응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사실을 전할 사람을 찾는다.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리고 나는 늘, 그 대상이 되었다.
가장 이상했던 경험은 스스로가 위험해질 뻔했던 날이다.
면접에 떨어지고 낙심한 채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던 저녁,
맞은편에서 할머니의 환영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리 오라고,
괜찮다고,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선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확 잡아챘다.
취한 듯 비틀거리는 노숙자 한 분이 내게 “동전 좀 줘봐”라며
술냄새 섞인 말투로 말을 걸었다.
나는 놀라 자리를 피했고,
그분은 몇 초 뒤,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떨어지셨다.
나는 그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되돌아온 사람이 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은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위험을 끌어당기고,
불행을 미리 알고,
죽음과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건 ‘죽음의 그림자’를 품은 존재가 아니라,
‘삶의 여백’을 감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는 걸.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살아 있는 존재들의 고요한 울음’에도 민감하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라면을 끓여놓고 TV를 보다가, 그대로 졸고 말았다.
깊은 잠, 무의식 속에서
할머니가 나를 두 팔로 흔들며 소리쳤다.
“불! 불이야! 일어나!”
놀라 깨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더니
가스불 위 냄비가 검게 타고 있었고,
매캐한 탄내가 주방 가득 퍼져 있었다.
할머니는 분명 돌아가셨는데,
그 순간,
그토록 또렷하게 나를 깨웠다.
귀문관살은 단순히 귀신을 보는 기운이 아니다.
그건 ‘사람의 마지막’을 느끼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지키는 존재가 아직 곁에 있음을 느끼는 감각’이기도 하다.
사랑의 그림자가,
어떤 형상으로든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
그걸 감지해 내는 눈.
그게 귀문관살이다.
예전에는 예지몽을 자주 꿨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마치 과거처럼 꿈에 등장했고,
그건 종종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꿈은 줄어들었다.
처음엔 아쉬웠다.
무언가 잃어버린 듯 허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감각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걸.
이제 나는 사람을 보면 안다.
말투, 눈빛, 기척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나와 맞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누군가를 조종하려 드는지,
감각적으로 느낀다.
엄마의 남자친구를 처음 봤을 때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기운이 너무 이상했다.
아무 말 안 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엄마를 지워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 고통이 내게도 남았다.
이제는 글을 쓴다.
감각은 줄어든 게 아니라,
문장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눈앞에 죽음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그 감정의 습도와 결을 기록할 수 있다.
꿈에서 할머니가 떠난 날의 안개,
노숙자의 손에 이끌려 되돌아온 생의 경계,
불 속에서 나를 깨운 손길.
이 모든 건 내 글의 재료이자,
삶의 증거다.
귀문관살은 무서운 별이 아니다.
사람의 울음과 이별,
그리움과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어떤 형상으로든 다가올 때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그건 다정한 기운이고,
내 삶에 있어 가장 선명한 축복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문 앞에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며,
나는 그 경계에서 조용히 글을 쓴다.
사라진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남겨진 것들에게 방향을 주는 일.
그게 귀문관살을 지닌 내가
이 생에서 맡은 역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