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장| 환승이별

떠나는 사람이 미리 도착한 곳에서, 나는 혼자 남아 배웅했다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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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늘 그랬다. 익숙함에 머물다 보면 누군가는 먼저 지쳐간다. 끝을 꺼내는 쪽이 이기적이라는 말은, 사랑이 무너진 이후에야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그전까지는 서로의 틈을 외면하고, 감정의 균열을 애써 덮으며, 체념처럼 이어진다. 나는 그런 사랑을 했다. 그리고, 환승이별을 당했다.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내 옆에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관에 앉아 동시에 웃고, 무언가를 공유하며 오랜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불안함이 되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말수가 줄었고, 연락이 뜸해졌다. 나만 느낀 변화는 아니었으리라. 다만 그때, 나는 모른 척을 택했다. 아니,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선 벌써 사랑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붙잡고 싶었다. 습관처럼 옆에 있어주길, 여전히 나를 바라봐주길 원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핸드폰 화면 너머로 스쳐 지나간 사진 하나. 그 사진엔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충격보다, 안도에 가까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아, 이제 끝이구나. 이대로 놓아줘도 되는구나. 그동안 매달렸던 모든 이유들이 부서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 그는 이별을 통보했다. 말 그대로 ‘환승이별’이었다. 마음이 먼저 떠나버린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 곁에 있었고, 나는 단지 그것을 확인받는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환승이별은 비겁하다고. 끝내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시작한 다음에 끝내는 방식은, 결국 자신이 받을 상처를 피하려는 회피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솔직했는지도 모른다. 미련 없이 떠났고, 단호하게 잘라냈으며, 새로운 관계로 옮겨갔다. 애매한 기대를 주지도,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시험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나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끝났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고, 이별을 감지하고도 입을 다물었으며, 애써 슬퍼하는 척했던 내 마음이.

그날 이후, 나는 혼자였다. 외롭다는 감정보다 허탈함이 컸다. 그를 잃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채 매달렸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결과였다. 사랑이란 감정에 기대어 관계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다 타버린 장작처럼 희미해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죗값이랄까.

시간이 꽤 흘렀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사랑도 있어야 다음 사랑을 잘할 수 있어’라고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다음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시는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젠 그 어떤 사랑도, 나를 잃으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배웠다. 그건 환승이별이 나에게 남긴 유일한 선물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의 마음은 붙잡는다고 붙잡히지 않고, 보내지 않는다고 남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걸. 관계는 유지하는 게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거란 걸. 한쪽이 멈추면 함께 멈춰야 하고, 한쪽이 방향을 바꾸면 같이 갈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는 걸. 그건 어느 날 툭 하고 다가온 이별에서 배운 가장 큰 진실이었다.

어느 오후, 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어떤 사람과 어떤 감정을 주고받고 있을까. 여전히 누군가의 옆에서 웃고 있을까. 문득 궁금했지만, 곧 사라졌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느라 바쁘다.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기보다, 내 시간을 내 마음으로 채워가고 싶다.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지만, 그 아픔마저도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환승이별은 나를 버린 일이 아니라, 나를 마주하게 한 사건이었다. 남겨졌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돌보는 법을 배웠고, 결국 나를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이제는 어떤 이별이 와도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사랑이 떠났다고 해서 나까지 사라지지 않음을, 나는 몸으로 겪으며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