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계절 사이의 마음
클래식 추천곡
Claude Debussy - Reverie (꿈)
햇살이 등을 떠밀고 지나가더니, 어느새 입술을 덥히는 바람이 달라졌다. 6월의 초록빛이 짙어지고, 7월의 폭염이 비를 머금더니,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달력이 또 한 장 넘어가 있다. 매년 느끼는 감정인데도,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오는지. 8월은 늘 그런 식이다. 한창 여름에 몰입해 있다가도, 누군가 가만히 등을 밀어 이별을 준비시키는 듯한 기분.
어느 날 아침, 시계의 초침이 경쾌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불현듯 실감이 든다. 아, 여름이 절정이라는 사실. 해가 지고 나면 슬그머니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과 퇴근길 지하철 냄새 속에 섞인 미세한 변화들. 에어컨이 없는 버스 안에서 마주한 낯선 사람의 땀방울, 찜통 같은 날씨 속에서도 웃고 있는 아이들의 소리, 모두가 여름의 얼굴이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계절이 지나가는 게 마냥 자연스럽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아직'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하루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7월의 끝자락에서, 나는 가만히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여름은 유난히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자란다. 아이의 키처럼, 한참 보지 않으면 몰라보다가 어느 날 확연히 느껴지는 변화처럼. 매미 소리도, 아이스크림도, 수박의 향도 여전히 그대로인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해가 바뀔수록 조금씩 변해 있다.
어릴 적의 여름은 찬란했다. 그땐 8월이 기다려졌고, 8월은 '끝'이 아닌 '절정'이었다. 방학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바닷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중에 꼭 다시 오자고 손가락을 걸었다. 그 무모한 약속들은 대개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으로 계절을 맞았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자주 붙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 8월을 ‘이별의 예고장’이라 불렀다. 한창 여름을 즐기고 있다가도, 8월이 오면 마음이 이상해진다고. 끝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묘한 감정일까. 우리는 늘 무언가를 준비하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계절을 맞이한다. 그렇게 또, 작별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길가의 나뭇잎은 여전히 푸르지만, 나는 그 푸름 속에서 이미 가을의 단서를 찾는다. 너무 뜨거운 햇살은 어쩐지 피곤하고, 아무 이유 없이 밀려오는 허무함은 8월의 그림자 같다. 유난히 무기력한 밤이면, 어딘가에선 비가 올 것만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무엇인가를 견디고, 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며.
그러니까, 8월은 참 묘한 달이다. 여름의 가장자리에 서 있지만 이미 다음 계절의 기척이 스며 있는, 이도 저도 아닌 그 어정쩡한 자리. 하지만 그런 경계의 시간이야말로 진짜 감정을 꺼내어 들여다볼 수 있는 때다. 지나간 것들을 떠올리기도 좋고, 다가올 무언가를 상상하기에도 알맞다. 8월은 그런 시간을 허락한다.
나는 이달의 문턱에 서서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번엔 제대로 보내보자고. 그냥 넘기지 말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있는 힘껏 들여다보자고.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없던 하루일지라도, 나에게는 반짝이는 문장 하나쯤 남겨둘 수 있기를.
지금 내 방 창밖에도 바람이 스쳐간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온 어떤 기억이 목울대를 지나 마음에 내려앉는다. 문득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또 한 계절이 지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전에, 나는 지금 이 계절을 조금 더 마음껏 안아보려 한다.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이 여름도 충분히 살았노라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눈 깜짝할 사이, 8월이 왔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