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따라 걷는 계절
클래식 추천곡
Frédéric Chopin – Nocturne in E-flat Major, Op. 9 No. 2
햇살은 여전히 더웠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유난히 조용한 오후였다. 기온은 높았지만, 그늘은 제법 깊었고, 바람은 숨을 죽이며 지나가다 가끔 소리 없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나는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걷고 싶었다. 그 이유 하나로 충분한 날이 있다. 이 계절은, 그런 날을 자주 만들어낸다.
발끝에 쌓인 여름빛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가로수 아래 깔린 그림자와 햇살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흘러가는 길. 간간히 자전거 벨 소리가 멀어지고,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졌다. 정적은 아니었지만, 소음도 아니었다. 이 거리의 소리는 ‘삶’ 그 자체로 존재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는 평온한 흐름. 나는 그 안에서 잠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다시 들이켜고 있었다.
낡은 운동화의 끈이 느슨해졌지만 굳이 멈추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걷다 보면, 마음의 속도에 맞춰 묶는 법도 잊게 되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마음이 허전해질 때마다 나는 걷는다. 뭔가를 피하려는 것도, 뭘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걸음을 옮기면 묘하게도 내 안의 쓸모없던 감정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마치 낡은 서랍을 하나씩 비워내듯. 그런 점에서 여름의 산책은 일종의 청소였다. 마음의 먼지를 털고, 눅눅한 감정을 말리고, 쓸쓸한 생각을 벽에 기대어 말끔히 정리하는 일.
"그래서 요즘 어때?" 누군가의 물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그저 괜찮아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아주 조금씩 회복 중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 일상처럼 보여도, 나는 내 마음 안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버티고 있는지 스스로만 알고 있었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그 아이처럼 나도 언젠가는,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다시 오긴 할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바람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여름과 가을이 서로 손을 맞잡는 듯한 풍경. 바람은 아주 작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에 있다면 충분해.’ 그렇게 마음속에도 여름 한 조각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그가 떠올랐다.
같이 걸었던 길. 웃으며 나를 불러주던 목소리. 벤치에 앉아 어깨를 기댔던 순간들. 그때의 여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빛났고, 또렷했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를 잃고, 점점 향기만 남는다. 마치 오래된 책갈피에 스며든 향수처럼. 나는 그 여름을 아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걸었던 여름날의 길을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였다. 풍경은 비슷했지만, 느낌은 달랐다. 그때와는 다른 내가, 그때의 여름을 다시 지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다만, 조금 뿌연 슬픔이 뒤따랐을 뿐.
길 끝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종이컵 안에서 일렁이는 김을 보며 생각했다. ‘모든 계절은 지나간다. 하지만 어떤 계절은 남는다.’ 내게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매년 돌아오지만, 같은 여름은 단 한 번도 없다. 매번 다르게 와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나를 남기고 간다.
지나가는 이가 나를 힐끔 본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의 여름 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했다. 어떤 여름은 사랑으로 기억되고, 어떤 여름은 이별로 각인된다. 그리고 또 어떤 여름은 조용한 산책처럼, 깊은 마음속에 고요히 머문다.
"오늘처럼 걷다 보면, 그 사람 생각이 덜 날 줄 알았는데."
작게 중얼였지만, 그 소리는 나무와 하늘과 바람에 묻혀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음에 남은 문장 하나가 노트에 적혔다. ‘사람은 결국,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걷는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나를 위해 시간을 들이는 일. 마음을 다독이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내밀한 회복을 하는 시간.
여름은 내게 그 여백을 주었다. 무언가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한 발짝씩 버티게 도와주었다.
길가에 핀 백일홍 하나가 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나에게 인사라도 건네는 듯. 나는 그 인사를 받아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름아. 올해도 너는 내 마음을 데우고 지나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