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그 부드러운 시작
스르륵. 정말 스르륵 지나가 버렸다. 마음은 이미 결제를 눌렀고, 학습지는 내 손에 들어왔으며, 책상 위엔 새하얀 첫 장이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펜도 준비했다. 커피까지 내렸다. 그날은 그렇게 완벽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시작’만 있었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나는 지금, 스르륵 학습지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안 하고 있다. 하고 있다는 건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지, 실제로 뭔가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 책을 매일 본다. 지나가다 눈에 띄고, 한 번쯤 펼쳐볼까 싶다가도 다시 덮는다. 그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을 넘겼고, 이제는 어느덧 눈에 익은 인테리어 소품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르륵, 하루 10분이면 된다고 했다. 광고에서는 부담 없는 학습이라 했다. 10분이 뭐라고,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도 안 되는 그 시간을 매일 흘려보낸다. 시작은 쉬웠지만 지속은 달랐다. 처음엔 내가 나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작심삼일도 못 가는 의지, 계획만 그럴싸한 사람이라는 자책이 나를 갉아먹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말 그게 다였을까? 아니었다. 나는 매일 일상을 버티고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을 해내며,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하루를 살아내는 중이었다. 그 속에서 10분은 결코 작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의자를 당기고, 집중할 준비를 하는 그 모든 과정은 10분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가끔은 앱에서 알림이 온다. “오늘의 학습, 시작해 볼까요?” 밝은 이모티콘이 붙은 그 한 줄에 나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지금은 아니라고, 오늘은 좀 쉬고 싶다고, 조용히 화면을 넘긴다. 그리고는 ‘내일부터’라는 말을 꺼내며 다시 미룬다. 그렇게 하루하루 밀려난 약속은 내 안에서 작은 죄책감이 되고, 그 죄책감은 나를 다시 미루게 한다. 악순환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구독을 해지하지 않았다. 하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일. 이건 어쩌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조용한 증거다.
어느 날 문득, 친구가 물었다. “그 학습지 아직도 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마음속으로는 늘 하고 있어.”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길 바랐다. 아니, 어쩌면 그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는 정말 매일 마음속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오늘은 몇 페이지를 할까 상상하고, 시간 나면 한 번 정리해 봐야지 마음먹고, 이건 나중에 써먹을 수 있겠다 생각하며 메모장에 단어 하나를 적는다. 실체 없는 움직임이지만, 내 마음은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준비 중일뿐이라는 걸. 그리고 그 준비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 안에 남기고 있었다. 삶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때로 너무 피곤하고, 때로 너무 아프고, 때로는 그냥 모든 게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을 지나면서도, ‘그래도 언젠간 해야지’라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는 아직 괜찮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결과로 사람을 판단한다.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완성했는지, 얼마나 남들보다 앞서 있는지.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 한다. 시작하지 못해도 괜찮고, 완주하지 못해도 괜찮고, 지금 잠시 쉬고 있어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언젠가 시작하겠다는 마음이, 매일 쌓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마음속으로만 공부 중이다. 조용히 나를 다독이고, 가끔은 나 자신을 변호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스르륵 하지 못한 날들이 쌓였지만, 그 위에 또 다른 하루가 얹히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마음속 공부가 손끝으로 이어질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그날이 오면 조용히 첫 장을 넘기며 말할 것이다. 이제야, 진짜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