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끝도 말하지 않은 사랑
아무도 모르게 스며든 사랑이 있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마음 한쪽이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햇살이 커튼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오듯,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한 사랑.
처음엔 그것이 사랑인지 몰랐다.
길을 나란히 걸으며 나누던 대화가 그저 편안했고, 그 사람의 존재가 하루를 조금 덜 무겁게 만들었다.
그날, 늦은 오후 공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은 순간, 그 사람의 웃음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그 한 번의 울림이 오래 귓속에 남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람 안에 내가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이런 사랑은 소란을 모른다.
바람 속에서 천천히 자라는 들꽃처럼,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는 내 일상의 틈을 따라 번져, 작은 말투, 웃음 끝의 주름, 눈길의 방향까지 기억하게 한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표정의 미세한 흔들림조차 놓치고 싶지 않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다.
손끝이 닿지 않아도,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마음은 늘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가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은 물결처럼 흘렀고, 어느새 발걸음은 다른 길 위에 있었다.
시작도, 끝도 말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같은 계절을 걷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빛이 꺼진 건 아니었다.
함께 웃던 날들의 공기, 마주 앉아 나눈 사소한 문장들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어떤 사랑은 도착지를 바라지 않는다.
그 시절, 그 마음으로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사랑이 나를 부드럽게 만들었고, 때로는 강하게 세웠다.
언젠가 이 마음을 놓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습으로, 다른 호흡으로,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을 테니까.
세상엔 수많은 빛깔의 사랑이 있다.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재로 변하는 사랑, 폭풍처럼 몰아치다 사라지는 사랑, 그리고 이처럼 고요히 스며드는 사랑.
내가 품었던 건, 아무도 모르게 시작해 끝까지 잔잔한 빛을 발하던 사랑이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사랑을 품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