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시간에 남은 온기

by Helia

그날의 손길이 아직도 손등에 머물러 있다.
온도는 미묘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는 여운처럼 피부 깊이 스며들어 있다. ‘오래도록’이라는 말은 달력 위의 숫자가 아니라, 이렇게 몸속에 각인된 감각을 뜻한다. 손끝에 남은 미묘한 떨림, 숨결이 닿던 순간의 공기, 이 모든 것이 시간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그 단어를 나는 좋아한다. 끝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번져나간다. 한낮의 빛이 석양에 젖어들 때처럼, 변화를 허락하면서도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도록’이 언제나 온화한 건 아니다. 이미 흐려져야 할 장면을 억지로 붙잡는 힘이 되기도 한다. 떠난 사람의 그림자를 품고 사는 일, 끝난 문장을 자꾸 되감아 읽는 습관. 그 지속성은 온기와 차가움을 동시에 품는다.

머릿속에는 이상하게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한겨울, 버스 창가에 앉아 있던 오후. 차창 너머로 가로등 불빛이 눈발에 부딪혀 번졌다. 창문 안쪽에는 내 숨결이 맺혀 둥글게 흐려졌다. 그때, 옆자리에서 부드럽게 불린 내 이름. 눈송이처럼 가볍게 떨어졌지만, 심장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 부름은 수많은 계절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래 남는 건 의식적으로 간직한 장면이 아니라, 불시에 스며드는 순간들이다.

그런 기억은 대개 사소하다. 아침 햇살이 잼병을 스치며 번쩍이던 장면, 좁은 골목에서 나란히 부딪히던 발걸음, 손끝에 묻은 체온. 그런 작은 순간들이야말로 오래 머문다. 삶의 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창한 장면보다 오래가는 건 이런 찰나다. 세월 속에서 바래기보다 빛을 머금어 더 짙어진다.

사람도 그렇다. 오래 머무는 이는 평생 함께한 이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공기를 바꾸는 사람이다. 웃음 한 번에 숨이 가벼워지고, 눈빛 하나로 긴장이 풀린다. 말없이 건네는 손길이 종일 마음속에 남는다. 그런 순간은 평생의 책갈피가 된다.

하지만 오래 남는 것이 언제나 축복은 아니다. 지워지지 않는 한마디, 끝내하지 못한 대답, 떠나던 날의 표정. 그 기억은 밤마다 낡은 창처럼 덜컥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다. 닫으려 해도 오래 남는 성질은 완강하다. 억지로 덮으려 하면, 물 위의 기름처럼 표면에 다시 떠오른다. 색이 옅어져도 형태는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오래 머무는 것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기쁜 건 오래 품고, 아픈 건 오래 두되,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는다. 그래야 기억이 나를 베어 피 흘리게 하지 않는다. 처음엔 서툴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상처였던 장면도 이야기로 꺼낼 수 있게 된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기억은 더 이상 족쇄가 되지 않는다.

사랑도 닮았다. 오래 사랑한다는 건 단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아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로를 새로이 바라볼 줄 아는 힘이다. 오래 곁에 있으면 설렘은 희미해진다. 대신 눈빛 속에 깊이가 깃든다. 그 깊이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함께 나눈 웃음과 견딘 고비들이 쌓여야만 완성된다. 그런 사랑은 겉모습이 변해도 뿌리가 깊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 단어를 스스로에게도 자주 건넨다. 오래 쓰자, 오래 좋아하자, 오래 나를 지키자. 이는 약속이자 다짐이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끝을 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오래도록은 미래를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다짐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두렵다. 지금의 고통이, 불안이, 이 답답함이 길게 이어진다면 어쩌나. 그 두려움이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오래가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오래 남고, 오래 가리라 믿었던 것들이 금세 사라진다. ‘오래도록’의 결정권은 내 손이 아니라 시간의 손에 있다.

그래서일까. 오래 남는다는 건 붙잡는 몸부림이 아니라, 흐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남아주는 것은 고맙게, 떠나는 것은 조용히 보내며, 빈자리에 새로운 숨결이 들어오게 하는 것. 오래도록은 집착과 놓아줌 사이의 줄 위를 걷는 일이다.

그 말에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그 속에는 오래된 편지의 종이 냄새, 닳아진 문손잡이의 차가움, 해 질 녘 강물에 번지는 금빛이 담겨 있다. 오래도록은 시간 속에 흩어진 감각을 한자리에 모아 세워두는 일이다. 그 자리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과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을 함께 바라본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오래 남는 장면이 되고 싶다. 오래 기억되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 속에 스며드는 호흡이 되고 싶다. 길어도, 짧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무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작은 것들을 오래 본다. 찻잔 위로 오르는 김,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손 위에 내려앉은 고양이의 묵직한 온기. 이 사소한 순간들이 훗날 내 마음속에서,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 오래 남는 건, 결국 사랑이 스쳤던 순간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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