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남긴 발자국
아침, 창가엔 꽃도, 종이도 없었다.
하얀 창틀 위에는 밤새 내려앉은 먼지와 얇은 이슬만 남아 있었다.
순간, 소녀의 가슴이 툭 하고 내려앉았다.
혹시 이게 끝일까?
다시는 오지 않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부엌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안 내려왔어? 물 길어 와야 할 시간인데.”
이복언니의 비아냥이 곧이어 뒤따랐다.
“딴생각하지 말고 네 처지나 생각해. 너는 이 집에서 맨 끝이야.”
그 말이 가슴을 콕하고 찔렀지만, 소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동이를 들고 밖으로 향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듯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
우물가로 가는 길, 소녀의 눈길은 자꾸 골목 끝을 훑었다.
혹시라도 그 소년이 어딘가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발걸음을 느리게 했다.
하지만 길목마다 바람만 스쳐갈 뿐,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오래된 느티나무 뿌리 옆에서 발이 멈췄다.
풀잎에 얇게 걸린 종이 한 장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햇빛이 종이 귀퉁이에 스치며, 그 위로 꽃가루가 가볍게 흩날렸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떼어냈다.
종이는 조금 구겨져 있었지만, 글씨는 선명했다.
> “네 마음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어.
나는 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너 때문에 아닌 것 같아졌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가 더 먼저 다가갈게.”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한 줄 한 줄이 소녀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도, 부엌 바닥을 닦으며도, 그 말이 계속 귓가를 울렸다.
**
밤이 되자, 소녀는 조그만 연필을 꺼냈다.
이번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 “너도 혼자가 아니야.
나도 그래.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 있어도, 늘 혼자인 기분이야.
하지만 네가 있어서, 오늘은 그렇지 않았어.
다음엔…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니?”
종이를 접어 창가에 놓으면서, 손끝이 떨렸다.
마치 이 한마디가, 모든 인연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바람이 길게 머물렀다.
꽃잎이 흔들리고, 창문이 살짝 덜컥거렸다.
그리고—
아주 미묘한 발자국 소리가, 창밖 어둠 속에서 천천히 스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