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라지지 않는 장면

by Helia

평생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던 순간, 공기마저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눈을 감아도, 세월이 흘러도, 그날의 냄새와 온도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비 오는 오후였다.
회색 구름이 낮게 드리운 창밖, 유리창 위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길게 목소리를 끌었다.
나는 낡은 카페 창가에 앉아, 손끝에 남은 커피 향을 천천히 굴렸다.
그 사람은 맞은편에 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대신 눈빛이 건넸다.
곧, 이 시간이 끝날 거라는 예감.

그 눈 속엔 작은 파도가 일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빗소리와 커피잔이 맞부딪히는 미세한 소리만이 시간을 메웠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연락도 없이, 그날의 빗줄기와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로 수백 번의 비를 맞았지만, 그날의 습기와 향기는 다른 어떤 장면으로도 대체되지 않았다.

또 다른 장면은 한여름의 마당이었다.
기와지붕 위로 햇빛이 번쩍였고, 장독대 옆 봉숭아꽃이 뜨겁게 피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 손톱 위에 붉은 꽃잎과 백반을 올려 감싸 쥐며 말했다.
“이러면 가을까지 물이 남는다.”
나는 그것이 계절을 붙잡는 비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남는 건 물든 손톱이 아니라, 봉숭아를 따던 할머니의 손등과 웃음이었다는 걸.
다시는 만질 수 없는 그 온기가, 나를 울리는 가장 선명한 여름이 되었다.

기억은 종종 불공평하다.
잊고 싶은 건 기어이 찾아오고, 붙잡고 싶은 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것들은 대개 완결된 순간이다.
더 이어지지도, 더 줄어들지도 않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결말.
그 안에는 내 숨결과 표정, 심장 박동이 그대로 봉인돼 있다.

글을 쓰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다.
잊지 않기 위해, 아니 잊을 수 없음을 더 깊이 새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손끝으로 이름을 적는 모든 일은 결국 한 장면을 지켜내려는 몸부림이다.
서랍 속 풍경은 변하지 않지만, 기록은 그 풍경에 다른 의미를 입힌다.
그래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우리는 다시 그 문을 열어본다.

물론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름다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병원의 차가운 복도, 하얗게 번지는 형광등, 점점 사라져 가던 체온.
그날의 공기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고, 여전히 그 가장자리에서 나는 떨어지지 못한 채 매달려 있다.
그 고통은 나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 한다.
그 상처가 없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잊을 수 없음마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는 수많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첫눈처럼 고요히 내려와 마음을 덮는 것도 있고, 폭풍처럼 들이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간 뒤 폐허를 남기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
우리는 그 순간의 숨결과 온기, 빛과 그림자를 기억한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모든 건 결국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언이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기억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몇몇은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때론 원치 않는 손님처럼, 불쑥 찾아와 내 마음 한가운데 앉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잊지 못한다는 건,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걸.
그리고 살아 있다는 뜻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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