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장| 히아신스, 너를 사랑해

사라져도 남는 향기

by Helia

추천 클래식
슈만(Robert Schumann) – 「Widmung (헌정)」, Op.25-1


히아신스를 처음 마주한 날을 기억한다. 겨울 끝자락, 바람이 아직 매섭게 남아 있던 계절이었다. 좁은 골목에 자리한 작은 꽃집 유리창 너머, 보랏빛과 연분홍빛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다른 꽃들보다 키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꽃집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히아신스예요. 향기가 참 진하죠.”
그 순간, 공기 속에 스며든 향기가 나를 휘감았다. 단순히 좋은 냄새가 아니라, 오래전 묵혀둔 기억을 건드리는 듯한 향. 무언가를 잊었다가 불현듯 되살아나는 순간처럼, 향기는 뇌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화분 하나를 집어 들며, 마치 오래된 약속을 되찾은 듯 두 손으로 꼭 끌어안았다.

집에 돌아와 창가에 화분을 올려두었다. 아직 잎사귀는 연둣빛으로 여리고, 꽃송이는 반쯤만 터져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첫사랑 같았다. 다 드러내지 못한 채 수줍게 피어나는 순간, 곧 터질 듯 가득 찬 숨결.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꽃을 바라보았다. 출근길에 나서기 전, 잠들기 직전에도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괜히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보듯, 그 화분 앞에서 나는 괜스레 마음이 설레곤 했다.

사랑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게 아닐까. 아무 이유 없이 자꾸 눈길이 가고, 별다른 대화 없이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주는 존재. 히아신스는 내게 그런 감정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이 지나 꽃송이가 활짝 터졌을 때, 방 안은 향기로 가득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바람이 스치는 듯했고, 책상 위에 쌓인 피곤이 한순간 녹아내렸다. 그 앞에 앉아 있으면 마치 누군가 내 곁에 앉아 등을 다독여주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히아신스야, 너를 사랑해.”

그러나 꽃이 피어나는 순간은 짧다. 며칠 지나자 꽃잎은 서서히 색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 위에 올려본 꽃잎은 여전히 향기를 품고 있었지만, 이미 다시 살아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잔해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종이에 싸두었다. 언젠가 지나간 사랑의 편지처럼, 버리기엔 아까운 기억이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사랑도 이렇게 끝나지 않을까. 아무리 뜨겁게 피어나도 결국은 시들어 흩어질 운명. 그 사실이 두려워 나는 오래도록 화분을 바라봤다. 마치 사랑의 끝을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사라짐이 꼭 비극만은 아니었다. 꽃잎이 떨어져야 새로운 구근이 힘을 모을 수 있고, 흙 속에서 다시 준비할 수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사실은 또 다른 시작일 수 있다는 것. 그 깨달음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언젠가 네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와의 사랑이 언제까지 갈지 나는 몰라. 하지만 끝난다 해도, 그 끝마저도 내가 사랑할 거야.”
그때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꼭 잡아주었고, 그 따스함이 말보다 더 큰 약속처럼 느껴졌다.

히아신스를 돌보는 일은 사랑을 지키는 것과 닮아 있었다. 물을 과하게 주면 뿌리가 썩고, 무심히 두면 금세 말라버린다. 햇빛은 필요하지만 강하면 상한다. 균형 위에서만 꽃은 자랐다. 사람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지나친 집착은 질식시키고, 무관심은 외롭게 만든다. 결국 중요한 건 섬세한 손길과 기다림이었다.

나는 히아신스 화분 앞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돌봄이라는 것, 끝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 무엇보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말보다 작은 행동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

너와 함께 걸었던 봄날의 거리도 그 꽃과 닮아 있었다. 네가 내 옆에서 웃으며 “향기 좋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네 표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 순간만은 시간을 멈출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계절은 바뀌고, 거리는 다른 꽃들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를 떠올린다. 네가 떠난 자리에서도 히아신스 향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히아신스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그것이 첫사랑일 수도 있고, 잊지 못할 추억일 수도 있다. 혹은 끝내 고백하지 못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오래도록 향기를 남기며 우리를 살게 하는 존재.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가장 명확한 증거라는 것을. 히아신스를 향해 매일 말을 건네듯, 나는 너를 향해 속삭인다. 꽃은 시들어도 이 고백은 시들지 않는다.

히아신스,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너를 사랑한 이 순간들을, 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계절처럼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꽃잎이 떨어져도 향기가 남듯,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은 잊히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