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장|내게 무해한 사람

상처 없이 오래가는 사람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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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을 오래 기다렸다.

누구나 다 착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만, 때때로 그 착함이 날카롭게 돌아오는 날이 있다.
말끝에 걸린 조언이 칼날 같고, 무심한 말투가 하루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날.
그럴 땐 더더욱 조용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것들만 찾게 된다.

‘좋은 사람’보다 ‘무해한 사람’을 찾게 되는 이유.
그건, 세상이 너무 쉽게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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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해롭지 않고, 누구에게도 무겁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특별히 잘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
과하게 다가오지도, 거칠게 밀쳐내지도 않는 사람.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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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그런 장면이 있다.
한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던 나와, 내 앞에 앉아 있던 그 사람.
말이 많지 않았던 시간, 우리는 각자의 책을 읽었고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중간중간 커피를 마시며 가끔 눈을 마주쳤고,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간 내내 편안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사람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사람과 있는 시간이 조용히 마음을 정리해 주는 느낌이었다.

무해한 사람은,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나 보다.
때때로 말이 없다는 건, 위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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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너무 많은 ‘좋은 사람들’에게 지쳐 있었다.
도움이랍시고 내 일에 관여하고, 걱정이랍시고 내 감정을 파헤치고,
다정함이라는 명분으로 내 울타리를 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더 나아지면 좋겠으니까.”
그 말들이 들을 때마다 나를 얼마나 작아지게 했는지,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선의가 때론 폭력이 된다.
내게 필요한 건 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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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하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방식이다.
간섭하지 않되, 방관하지 않고.
지켜보되, 뒤따르지 않으며.
묻지 않되,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 사람과 걷는 길은 조용했다.
발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괜히 한숨을 쉬었고,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맞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왜 그래?’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아무 말도 없이 함께 걷는 사람이 더 큰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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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사람은 경계선을 넘지 않는다.
가까워져도 조심스럽고, 익숙해져도 배려가 있다.
그 사람 앞에선 과장된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되고,
감정을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은 척’을 안 해도 되는 사람.
그게 얼마나 드문지,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사람과 있을 때의 나는
가장 나답고, 가장 편안했다.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전에
‘내게 해롭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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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랑은 들뜨거나 요란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책갈피를 다시 찾은 듯한, 조용한 떨림이었다.

그 사람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굳이 맞장구를 치지 않았고,
내가 침묵할 때에도
“왜 말 안 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앞에서 조용히 울 수 있었고,
울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커피를 마실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은 물어보지 않았고, 그래서 더 고마웠다.

무해한 사람이란,
아물지 않은 상처를 굳이 덮어주지 않고
그저 조심스레 그 옆을 지나가 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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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선 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관계에 오래 있었던 사람일수록,
무해한 사람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난다.

처음엔 이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왜 이렇게 편하지?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뭔가 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을 지켜주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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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사람과의 관계는
바람과 나뭇잎 사이처럼 느껴진다.
접촉하지만, 상처는 없고.
흔들리지만, 부서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게 말 대신 존재로 말을 걸었다.
“나는 너를 바꾸고 싶지 않아.”
“네가 지금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
그 침묵의 언어들이
나를 가장 크게 안아준 말이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
괜히 오늘 본 하늘 이야기를 하고 싶고,
조금 전 들었던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진다.

말을 강요하지 않으니
말이 흘러나온다.
침묵이 부담되지 않으니
오히려 침묵 속에서 더 많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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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바꾸려 들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 불쑥 들어가지 않고,
그저 조용히, 따뜻하게 곁에 있는 사람.

말보다 온기가 먼저 닿는 사람.
손보다 시선이 먼저 머무는 사람.

누군가 힘들어도
“왜 힘들어?”라고 묻지 않고,
그저 조용히 차 한 잔을 내줄 수 있는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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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건 사랑보다 더 큰일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해 줬다는 건 분명했다.

무해한 사람은
누구보다 조용하게 내 인생에 들어와
누구보다 오래 남는 사람이다.

어떤 날은 조용히 웃어주고,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는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시간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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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온도는
말의 수가 아니라
무해함의 정도로 정해진다고 믿는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나는 당신에게 무해한 사람인가요?
당신도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해요.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게 사랑의 시작이자 전부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