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라는 주문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마음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울리는 물음표. What if—만약에. 만약 내가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만약 그날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서지 않았다면? 이 질문들은 별똥별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그 궤적은 오래도록 시야에 남아 나를 붙잡는다. 현실은 바뀌지 않지만, 그 상상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내가 되지 못한 또 다른 내가, 저편에서 손을 흔든다.
어릴 적 이사하던 날이 떠오른다. 낡은 아파트 복도에는 박스들이 어지럽게 쌓였고, 창밖 놀이터에는 여전히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손에 쥔 구슬주머니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그 아이들과 여전히 함께 뛰놀았을까. 아니면 언젠가는 어차피 멀어졌을까. 작은 선택 하나가 인생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나는 단 한 번의 “만약”으로, 내가 되지 못한 또 다른 나를 상상한다.
사랑은 더 그렇다. 그날,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던 순간. 고백 대신 웃음으로 덮어버린 대화. 끝내 놓지 못한 손. 만약 그때 솔직했더라면? 아마 다른 얼굴이 지금 내 곁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면 또 다른 인연은 만나지 못했을 터다. 어떤 만남은 오래 머무르지 않기 위해, 나를 잠시 흔들어주기 위해 태어난다. 그 아픔은 결국 내 마음을 조금 더 깊게, 삶의 결을 조금 더 진하게 만든다.
버스 창가에 앉아 있던 날도 생각난다. 강연회 초대장이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나는 끝내 내려가지 않았다. 만약 그때 용기 내어 들어갔더라면? 내 삶의 방향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른다. 기회는 늘 우리 앞에 조용히 놓여 있다. 다만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다. 손끝에서 스쳐간 순간들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오래 울린다.
그러나 “만약”은 후회로만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두려움의 문을 두드리는 주문이 되기도 한다. What if I try? 만약 내가 시도한다면?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쓰지 않는다면? 언젠가 쌓여만 가는 말들이 나를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빈 노트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그 순간의 “만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인생은 강과 닮았다. 흐름은 정해져 있지만, 작은 돌멩이 하나가 물길을 바꿀 수 있다. 그 돌멩이가 없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바다에 닿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 또한 나의 바다다. “만약”은 수많은 가능성을 열어 보이지만,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만약”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서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평행우주를 상상한다. 동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 각각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그림자들. 그중 어떤 나는 더 행복할까, 어떤 나는 더 불행할까. 하지만 설령 그런 우주가 존재한다 해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순간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What now,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What if”는 후회와 다짐 사이에서 흔들린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게 만들면서도 지금 가진 것을 더 붙잡게 만든다. 나는 종종 묻는다. What if tomorrow never comes? 만약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오늘, 사랑한다 말해야 한다. 고맙다 전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지금 시작해야 한다.
삶은 “What if”와 “So what” 사이를 오간다. 만약 그랬더라면… 하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이 모든 질문들은 의미를 갖는다. 밤하늘에 흩어진 별빛이 반짝이며 속삭인다. What if you believe? What if you dare? What if you live fully, right here, right now? 나는 대답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나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What if는 무엇인가요? 그 질문은 아직 늦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의 오늘을 바꿔놓을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