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하루가 나를 지탱한다

자유와 불안 사이에서 발견한 평범의 힘

by Helia

아침은 억지로 울리는 알람 소리가 아니라, 몸이 스스로 느끼는 리듬으로 열린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빛이 벽에 닿아 흘러내리고,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세상은 분주하게 흘러가지만, 내 시간은 아직 고요하다. 출근이 없는 삶은 이렇게 시작된다.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냉장고 안에 늘 준비해 둔 하얀 물병이 기다리고 있다. 전날 끓여 식힌 물을 담아둔 것이다. 뚜껑을 열고 컵에 따를 때마다 맑은 소리가 작은 종소리처럼 퍼진다. 차갑게 식은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 밤새 남아 있던 졸음과 무거움이 씻겨 내려간다. 커피도 차도 필요 없다. 이 단순한 한 모금이 내 하루를 깨우는 작은 의식이다.

집 안은 적막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만큼 조용한 공간. 나는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본다. 옆집 아이는 가방을 메고 서둘러 길을 나서고, 택배 아저씨는 무거운 상자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나만이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스민다.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고, 고립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서성인다.

점심 무렵이 되면 가끔 동네를 한 바퀴 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을 집어 들고, 시장 골목에서 싱싱한 채소 몇 단을 산다. 길모퉁이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고양이, 오래된 카페 안에서 라디오 볼륨을 올리는 청년, 햇살에 반짝이는 감자 박스. 이런 사소한 풍경들이 묘한 위로가 된다. 마치 세상이 내게 “너도 살아가고 있다”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줄어든 탓에, 작은 대화 한마디가 크게 남는다. 편의점에서 건네는 “봉투 필요하세요?”라는 짧은 질문조차 오랫동안 귓가에 맴돈다. 하루 종일 침묵 속에 있다 보면, 그런 작은 문장이 내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살린다.

집에 돌아오면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책을 꺼내 한두 장 읽다가 덮고, 휴대폰으로 영상을 틀어보다 졸음에 빠지기도 한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루는 어느새 저물어간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가도, 이 또한 내 몫의 하루라는 사실이 나를 달랜다. 누구에게 쫓기지 않고 스스로의 속도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큰 특권일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이 되면 창밖 풍경은 조금 달라진다. 퇴근길에 지친 얼굴들이 하나둘 불빛 속으로 돌아온다. 나는 부엌에서 간단한 음식을 차린다. 라면이 김을 뿜으며 끓어오르고, 냉장고 속 반찬이 소박하게 그 자리를 채운다. 특별하지 않은 식탁이지만, 그 평범함이 오히려 진실하게 다가온다. 음식을 씹는 소리와 함께 오늘 하루가 내 안에 새겨진다.

밤은 백수의 하루 중 가장 솔직한 시간이다. 늦게 자도 괜찮고, 내일 아침 달려 나갈 이유도 없다. 그 자유는 달콤하지만, 동시에 불안도 스며든다. 내일은 뭘 하지? 그 질문이 고요한 방에 메아리처럼 울린다. 자유와 불안은 늘 붙어 다니며, 나를 흔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아둔다. 음악을 틀고 앉아 있으면, 그 두 감정이 뒤엉켜 묘한 울림을 만든다. 마치 춤을 추다 바닥에 철썩 주저앉는 파도처럼.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인생을 채우는 건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평범한 날들이다. 냉장고 물 한 컵, 편의점에서 집어든 빵, 오후 햇살 아래 하품하던 고양이, 저녁 식탁 위의 라면 국물.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내 삶을 만든다. 사람들은 특별한 사건을 기다리지만, 사실 우리를 지탱하는 건 ‘아무 일 없는 하루’다.

나는 내일도 아마 비슷한 하루를 살 것이다. 늦게 일어나 냉장고 물을 꺼내 마시고, 동네를 조금 걷다 들어와 시간을 흘려보내고, 밤에는 불안을 안은 채 음악을 듣다가 잠들 것이다. 하지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없다. 같은 물도, 같은 골목길 바람도, 같은 노을도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을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 한다. 사소한 장면에 마음을 멈추고, 반복된 하루에 의미를 붙인다.

아무 일 없는 하루가 가장 특별하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은 알겠다. 누군가에겐 지루함으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가장 솔직하고 진짜인 시간이다. 내일도 그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아무 일 없다는 게, 사실은 가장 큰 사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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