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속삭임
꿈속에서 나는 또다시 그를 만났다. 현실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새벽마다 불현듯 나타나는 사람. 그의 얼굴은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기억 속 어디선가 본 듯한데,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말할 수 없는 얼굴. 그러나 중요한 건 이름도, 과거도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오직 그와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이 진실이었다.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작은 카페였다. 창가에 놓인 둥근 테이블,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흘러드는 햇살, 가느다란 커튼 사이로 비치는 바람결까지. 모든 풍경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빛바랬으면서도 또렷했다. 그의 앞에는 카푸치노가 놓여 있었고, 잔 위의 거품은 부드럽게 일렁이며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그는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입술을 적셨다. 흰 거품이 살짝 묻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 동작 하나에도 내 시선은 꼼짝없이 붙들렸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응시가 아니었다. 애틋하면서도 간절한, 설명할 수 없는 깊이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 속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지만, 정작 들려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열리고 닫히며, 의미를 품은 파동이 내게 닿으려 했다. 그러나 소리는 없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입모양을 읽으려 애썼다. 사랑한다고 말한 걸까? 미안하다고? 아니면 전혀 다른 고백?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입술의 그림자만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꿈은 늘 이런 식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흐릿하게 지워버린다. 꼭 붙잡아야 할 말을 가려버리고, 절실한 장면은 아침 햇살에 녹여 내린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가듯 조급했지만, 그는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며 계속 속삭였다. 차라리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 장면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됐다.
창밖에서는 사람들이 오갔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 소리도, 대화도 없었다. 오직 시각만이 살아 있는 세계. 세상 전체가 음소거된 듯, 우리 둘만의 무대가 펼쳐졌다. 그 고요 속에서 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침묵은 때로 소리보다 더 큰 파문을 남기니까.
나는 이 꿈을 자꾸만 되새기게 된다. 꿈 일기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희미해질까 두려워서다. 새벽에 눈을 뜨면 손끝으로 기억을 붙잡듯 노트에 적는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속삭였다. 나는 듣지 못했다. 이 단순한 문장을 쓰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묘하게 진정된다.
왜 나는 그를 꿈에서만 만나는 걸까. 현실에서는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무의식이 만들어낸 보상일까. 혹은 실제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꿈을 단순히 뇌의 장난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꿈은 무의식의 편지다. 낮에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새벽마다 은밀하게 스며 나오는 것. 내가 애써 외면한 그리움과 결핍이 빛을 입어 등장하는 것.
그는 누구일까. 과거의 연인일까, 아니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일까.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를 만나는 순간마다 마음속 깊은 곳이 저릿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느낄 수 없는 감각. 어쩌면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꿈속에서 만나는 동안만큼은, 그는 너무도 진짜 같으니까.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한다. 그가 내게 전하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혹시 ‘괜찮다’는 위로였을까. ‘잊지 말라’는 당부였을까. 아니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었을까. 들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 가능성은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리움을 더 깊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사실 중요한 건 그 말의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들리지 않았기에, 나는 끝없이 그를 떠올린다. 만약 명확히 들려버렸다면, 아마 이토록 오래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침묵은 때때로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기는 차갑고, 옆자리는 비어 있다. 꿈속의 카푸치노 향은 이미 사라졌고, 그의 눈빛만이 내 마음을 감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빈자리를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재 덕분에 나는 글을 쓴다. 꿈 일기를 남기며, 나의 무의식과 대화한다.
누구나 꿈속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떠나버린 가족,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누군가. 우리는 그들을 현실에서 붙잡지 못하기에, 꿈이라는 틈새를 빌려 만난다. 그래서 꿈은 슬프면서도 따뜻하다. 허무하면서도 위로가 된다.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속삭였다. 나는 듣지 못했다. 이 문장은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꿈 일기의 형식일지 모른다. 열린 결말, 끝없는 여운, 해석을 기다리는 문장.
그가 내게 전하려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사과? 약속? 아니면 전혀 다른 고백? 나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오늘 밤도 그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이다. 그리고 또다시 속삭일 것이다. 나는 듣지 못할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다.
꿈 일기는 그래서 멈추지 않는다. 내 무의식이 계속 나를 흔드는 한, 나는 새벽마다 노트를 펼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먼 언젠가, 그의 속삭임이 선명하게 들려올 날을 기다릴 것이다. 혹시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잊었지만 잊히지 않는 사람, 현실에서는 볼 수 없지만 꿈에서는 늘 찾아오는 얼굴. 그 얼굴이 속삭이는 말, 당신은 들을 수 있었는가. 아니면, 나처럼 끝내 듣지 못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