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날짜의 여운
달력 속 숫자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흔들 수 있을까. 9월 16일, 그 평범한 날짜가 내겐 오래전부터 작은 흉터처럼 남아 있다. 오늘도 달력의 그 칸을 바라보다가 문득 손끝이 멈춘다. 다른 날과 다를 것 없는 숫자인데, 왜 나는 이 날에만 자꾸 멈추는 걸까.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창문을 열자 여름의 뜨거움은 온데간데없고, 가을의 냄새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단정했다. 갓 다린 흰 셔츠처럼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게 스며드는 공기였다. 기분은 묘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버스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파랗게 높아진 하늘 위로 제비들이 갈피 없이 날아간다. 오래전 교실 창가에서 본 풍경이 겹쳐진다. 분필 가루가 흩날리던 교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멀리 들리던 오후. 그날도 바람은 지금처럼 불었다. 괜히 창밖만 바라보다 수업을 놓쳤던 시절. 어쩌면 그게 9월 16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감각만은 선명하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빛, 그때의 서늘함이 다시 내 주위를 맴돈다. 숫자는 잊어도 공기는 잊히지 않는 법이다.
오전에는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몇 년째 소식 없던 친구의 이름이 스팸함에 걸려 있었다. 단순히 비슷한 이름이었지만,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마지막으로 그 친구와 연락한 게 언제였더라. 아마 이맘때였다. 기억 저편에서 ‘잘 지내냐’ 던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답장을 하려다 말고 덮어둔 날. 지금은 번호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 메시지가 혹시 9월 16일에 도착한 건 아니었을까.
점심 무렵, 카페에 들렀다. 창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는 두 남녀가 보였다. 잔에 스며든 빛이 유리창에 부서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타고 번졌다. 나는 괜히 오래 앉아 있었다. 오래전, 오랜만에 연락 온 사람과 마주 앉아 마셨던 카푸치노가 떠올라서다. 그의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 역시 9월 16일의 오후와 겹쳐진다.
오후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었다. 태양은 여전히 밝았지만 빛은 이미 기울어 있었고, 발밑의 그림자는 가로등처럼 늘어졌다. 그림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건 그림자다. 나는 그늘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맴돌았다.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날이다.”
사람마다 마음속에만 간직한 기념일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도 모르는, 때로는 본인조차 잊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날. 내겐 그게 9월 16일이다. 첫사랑의 고백도, 마지막 이별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린다. 사건은 사라져도 감정만은 잔해처럼 남아 이 날짜를 붙잡는다.
저녁이 다가오자 거리는 붉은빛에 잠겼다. 가로등이 켜지고, 가게의 불빛이 하나둘 스며들며 도시는 새로운 얼굴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웃고 떠들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홀로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활기 속의 고립, 웃음 사이의 침묵. 어쩌면 이 낯선 고립감 때문에 내가 9월 16일을 잊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연락하고 싶은 이름들이 스쳐 간다. 하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보내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이 날짜를 채우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책상에 앉아 오래된 노트를 펼쳐본다. 몇 해 전 9월 16일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그런데 마음은 알 수 없이 불안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지금 내 마음과 똑같았다. 마치 수년 전의 내가 오늘을 예감이라도 한 듯.
나는 묻는다. 왜 하필 9월 16일일까. 수많은 날짜 중에서 왜 이 날만이 이렇게 반복해서 나를 불러 세울까. 대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날짜가 내 인생의 갈피라는 사실이다. 언제든 펼치면 그 자리에 있는 책갈피. 사건은 잊혀도 마음은 여기에 머문다.
밤이 깊어간다. 창밖에는 보름을 지나온 달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귀뚜라미 울음이 귓가를 간질인다. 하루는 저물지만, 내 안의 감각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혼자만 잊지 못하는 날. 그날만 되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지나온 시간이 겹쳐 오는 그런 날 말이다. 있다면, 아마 그것이 당신 삶의 비밀스러운 갈피일 것이다.
달력은 곧 17일로 넘어간다. 그러나 9월 16일은 끝나지 않는다. 오늘의 바람, 길게 늘어진 그림자, 보내지 못한 메시지,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이 모든 감각이 내 안에 오래 남는다. 언젠가 다시 이 날짜를 펼쳤을 때, 나는 또다시 오늘을 떠올리며 숨을 고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오늘, 9월 16일. 나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닿지 못한 말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