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장|삶

상처와 회복, 그리고 작은 희망들에 대하여

by Helia

추천 클래식

루트비히 판 베토벤 –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 2악장 Allegretto


삶은 늘 우리를 시험한다. 예상치 못한 날씨처럼, 어느 날은 눈부신 햇살로 반짝이지만 또 다른 날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길을 막는다.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그려도, 삶은 제멋대로 굽이치며 우리를 끌고 간다. 마치 산맥 사이를 흘러내리는 강물이 제 뜻대로 흐르는 것처럼.

나는 가끔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하루의 피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얼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 그 순간 문득 깨닫는다.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장면들 하나하나를 견뎌내는 것이라는 걸.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너, 지금 이 길을 계속 갈 거니?”

매일 비슷한 아침이 시작된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늘 같지만, 내 마음은 날마다 다르다. 어떤 날은 설레고, 어떤 날은 지치고, 어떤 날은 그저 무표정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번 다른 감정이 흘러드는 것, 그게 바로 삶이다.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 하나를 들고 퇴근길에 서 있는 내 모습도 그렇다. 사소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삶은 흘러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장면이지만, 결국 나를 지탱하는 건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물만 주는 건 아니다. 뜻밖의 상실, 감당하기 힘든 상처, 불시에 찾아온 이별. 그럴 때마다 삶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삶은 회복의 기회도 준다.

나는 한때 차갑게 식은 국밥 그릇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적이 있다. 밥 한 숟가락 넘기지 못할 만큼 마음이 무너져 있던 시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리에서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삶은 그렇게 잔인하면서도 끈질기다.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게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또 다른 꽃을 피우게 한다.

“왜 살아야 하지?”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이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다. 의미를 묻는 순간, 이미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삶은 완벽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매일 조금씩 다른 힌트를 내민다. 길가의 가로등 불빛, 갑자기 내린 비에 젖은 운동화, 지워버린 카톡 draft. 그런 작은 순간들이 삶의 의미를 일깨운다.

삶은 혼자가 아니다. 늘 누군가와 얽히고, 그 관계 속에서 울고 웃는다. 어떤 이는 내 상처를 치유해 주고, 또 다른 이는 아물어 가던 흉터를 건드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또다시 마음을 열고, 결국 다시 살아간다.

사람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회복의 손길이 되기도 한다. 사랑과 우정, 갈등과 화해, 그 모든 교차가 삶을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 자체가 삶이다.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뜻대로 풀리지 않고, 실패가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함이 삶을 더 빛나게 한다.

금이 간 도자기에 금을 채워 더 값지게 만드는 ‘킨츠기’처럼, 균열은 새로운 아름다움이 된다. 우리의 실패와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을 예술로 만든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삶은 우리를 시험한다.
그러나 삶은 결국 우리를 살게 한다.

나는 삶을 바다에 자주 비유한다. 바다는 잔잔할 때도 있고, 거칠게 파도칠 때도 있다. 때로는 떠밀려 어디론가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는 결국 제 길을 찾아 흐른다. 삶도 그렇다. 중요한 건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다시 노를 잡는 것이다.

설령 잠시 떠밀리더라도,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는 중이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끝내 숨을 고르고 다시 헤엄치는 것. 그게 바로 삶이다.

삶은 거대한 업적이나 화려한 순간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지탱하는 건 작은 희망들이다. 눈부신 새벽빛, 낯선 이의 미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식지 않은 차 한 잔.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삶을 견디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작은 일상의 조각들을 남긴다. 언젠가 돌아봤을 때 그것들이 내 삶을 빛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소박하더라도 진심으로 살아낸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삶은 상처와 회복을 동시에 품고, 무너짐과 다시 일어섬을 반복하며, 결국 작은 희망들 위에 서 있다.

나는 오늘도 안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삶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