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장|뜨거운 겨울

눈발 속 불씨

by Helia

추천 클래식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제2번 c단조, Op.18, ‘절망 속에서 솟아오른 희망의 불꽃’


겨울은 차갑다고만 배웠다. 바람은 매섭고, 눈은 싸늘하고, 공기는 살을 에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어떤 겨울은 이상했다. 추워야 마땅한 계절이 오히려 뜨겁게 느껴졌다. 얼음 속에서 불씨가 피어오르듯, 차가운 시간 속에서 더 강렬한 체온과 심장의 뜨거움을 알아버린 것이다.

나는 겨울밤마다 뜨거운 증거들을 발견했다. 편의점에서 꺼낸 컵라면 뚜껑 위로 피어오르던 김, 장갑 틈새로 스며드는 누군가의 손길, 차가운 창문에 번져가던 입김. 그것들은 모두 겨울을 차갑게 정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차가움은 있었으나, 그 속에서 내가 붙들고 있던 건 언제나 뜨거움이었다. 겨울은 아이러니의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길 위에서 오히려 가장 뜨겁게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어릴 적 겨울은 순수한 놀이의 시간이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손끝이 빨갛게 얼어붙을 때까지 웃어댔다. 집에 돌아오면 전기난로 위에 손을 얹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물 앞에서 온몸이 녹아내렸다. 추위가 없었다면 뜨거움의 감각도 몰랐을 것이다. 차갑게 얼어붙는 순간이 있었기에 그 작은 온기들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의 겨울은 다르게 다가왔다. 단순히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풍경이 되었다. 관계가 끊어지고, 사랑이 멀어지고, 실패와 상실이 겹겹이 쌓일 때, 나는 늘 겨울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분노, 그리움, 눈물, 그리고 간절한 사랑. 모두 뜨겁고 치열했다.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계절일수록 내 안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내가 겪은 겨울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은유였다.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불씨를 찾았다. 때로는 커피 한 잔에서, 때로는 한 통의 문자에서, 때로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눈물에서 그 불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불씨들이 나를 버티게 했다. 겨울은 혹독했지만, 나는 그 뜨거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겨울의 거리를 걷다 보면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왜 추울수록 더 서로를 찾게 될까?” 여름에는 혼자서도 견딜 수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왠지 더 손을 잡고 싶어지고, 더 곁에 있고 싶어졌다. 아마도 뜨거운 겨울의 비밀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추위가 사람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끌어당기는 힘이 되어버리는 것. 겨울이 차갑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뜨거운 것을 찾는 것.

뜨거운 겨울은 결국 삶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었다. 외로움은 차갑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갈망은 뜨겁다. 상실은 차갑지만, 그 뒤에 오는 기억은 뜨겁다. 실패는 차갑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는 뜨겁다. 이렇게 겨울은 내게 삶의 모든 아이러니를 가르쳐주었다. 차갑다는 건 뜨거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이제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 뚜렷하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바람은 여전히 매섭지만, 나는 안다. 그 바람을 뚫고 나오는 입김이 곧 뜨거움이라는 것을. 겨울이 오면 나는 다시 확인한다. 내 안에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다는 사실을.

“겨울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뜨거웠다.”
이 문장이 내 지난 계절들을 설명해 준다. 나는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더 뜨겁게 사랑했고, 더 뜨겁게 상처받았으며, 더 뜨겁게 살아남았다. 그것이 내가 마주한 겨울의 진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