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가르쳐준 삶의 태도
세상은 점점 빨라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메시지가 오가고, 사진은 촬영과 동시에 화면에 뜬다. 그러나 내 손에 있는 카메라는 여전히 느리게 숨 쉰다. 셔터를 누른 순간, 결과는 즉시 확인되지 않는다. 필름 속 어딘가에 스며들어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느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불편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기다림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설렘이 있었다.
처음 필름카메라를 손에 넣었을 때의 감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묵직하게 손에 감기는 무게, 금속이 주는 차가운 촉감, 다이얼을 돌릴 때마다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저항. 그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오래된 악기 같았다. 연주자가 현을 튕기며 소리를 만들어내듯, 나는 셔터와 조리개를 조율하며 빛을 연주했다. 화면에 즉시 결과가 뜨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매혹적이었다. 결과를 확인할 수 없으니, 한 장 한 장은 기도 같았다.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며칠을 기다리던 시간은 나를 조급함에서 해방시켰다. 언제나 곧장 피드백을 받는 시대에, 며칠을 기다려야만 내 기록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고요였다. 현상된 봉투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열 때, 두근거림은 편지를 뜯는 순간과 닮아 있었다. 내가 바라본 장면이 온전히 돌아올지, 아니면 빛이 새거나 초점이 흔들려 실패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나의 흔적이었다. 삭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기록이었다.
필름카메라와 함께 걷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느렸다. 수십 장을 한 번에 찍을 수 없으니, 어떤 순간을 붙잡을지 고민하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풍경도, 필름 앞에서는 잠시 멈춰 서야 했다. 그렇게 신중히 고른 한 컷은 내 삶의 태도와 닮았다. 모든 순간을 다 가질 수 없듯, 필름 한 롤에도 한정된 기회만 주어진다. 그래서 나는 더 절실하게 바라보고,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길 위에서 카메라는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저녁노을에 물든 강가에서, 비에 젖은 골목에서, 창가에 앉은 누군가의 옆모습에서 나는 카메라를 꺼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면은 나만의 것으로 변했지만, 현상된 사진을 받아 들고 나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찍은 건 풍경이 아니라, 그때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피사체는 다르지만, 사진 속에 남은 것은 내 안의 떨림이었다.
디지털이 속도를 자랑할 때, 필름은 느림의 미학을 지켰다. 그것은 오래된 편지와 닮아 있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면 곧장 도착하는 메시지와 달리, 편지는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필름은 그런 편지와 같다. 셔터를 누른 후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은 삶과 닮아 있었다. 우리는 늘 계획하고 실행하지만, 결과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기대와 달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을 살았다는 것이다.
흔들린 사진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의 진동을 고스란히 품은 증거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얼굴, 빛이 과하게 번져버린 배경, 현상 과정에서 생긴 작은 얼룩들. 디지털이라면 삭제했을 이미지들이 필름에서는 살아남았다. 그 결점들이 오히려 솔직함이었다. 인생이 늘 선명하고 매끄럽지 않듯, 사진도 그렇다. 나는 그 불완전함을 통해 더 진실한 아름다움을 배웠다.
필름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을 환기시키는 열쇠였다. 수천 장의 디지털 사진이 끝없는 저장 속에 묻히는 동안, 필름 사진은 앨범에 차곡차곡 쌓이며 무게를 가졌다. 앨범을 꺼내는 행위는 단순히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냄새와 공기까지 불러내는 의식 같았다. 한 장을 마주하는 순간, 햇살의 방향과 발자국 소리까지 되살아났다. 필름은 기억을 붙잡는 게 아니라, 기억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깨달았다. 필름카메라는 단순히 사진을 찍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닮아 있었다. 조급해하지 말 것, 흔들림을 실패라 부르지 말 것, 기다림 속에서 더 큰 기쁨이 온다는 것. 작은 기계 속에 담긴 철학은 내 일상에도 스며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은 결국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나 순간을 기록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불완전한 흔적 속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는다.
지금도 필름카메라를 손에 쥐면 묘한 전율이 인다. 금속의 차가움, 셔터가 떨어질 때의 둔탁한 울림, 필름이 감길 때의 작은 소리. 그 모든 감각이 합쳐져 나는 다시 시간의 강 속으로 들어간다. 필름은 과거의 도구가 아니다. 여전히 현재를 살아내는 나의 방식이다. 빠른 세상 속에서 느림을 택하는 용기,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을 껴안는 태도, 기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필름카메라가 내게 가르쳐준 삶의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필름을 사랑한다. 단순히 사진을 남겨주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불완전한 순간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흔적을 귀하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사진관에서 봉투를 열던 두근거림, 흔들린 사진 속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감정, 필름 한 롤에 담긴 나의 하루와 계절. 그것들이 여전히 내 삶을 지탱하는 작은 증거다. 언젠가 카메라가 멈추더라도, 그 속에 담긴 기다림과 떨림은 오래도록 나를 살아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