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유의 기록
혹시 제목 없는 그림 앞에서 멈춰 서 본 적 있나요? 화려한 색감도 아닌데 묘하게 발길을 잡아끌던 순간. 무엇을 말하는지 알 듯 말 듯, 그러나 그만큼 오래 머물게 했던 경험 말이에요. 우리는 늘 제목이 붙은 것에 익숙합니다. 영화에는 제목이 있고, 책에는 표제가 있고, 심지어 우리 하루에도 ‘직장인’, ‘엄마’, ‘작가’ 같은 이름표가 달려 있죠. 그런데 모든 것을 벗겨낸 자리, 이름 없는 상태로 서 있을 때 느껴지는 그 어색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자유. 나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사랑했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제’라는 이름 없는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무제는 단순한 공백이 아닙니다. 오히려 넘쳐흐르는 감정과 생각이 차마 한 단어로 묶이지 못했을 때 탄생하는 이름 없는 이름이죠. 그림에서의 무제는 그렇습니다. 어떤 화가는 붓질을 마무리하고도 끝내 제목을 붙이지 않습니다. 보는 이에게 해석의 자유를 남겨두려는 선택일 수도 있고, 혹은 단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기 싫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제의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어떤 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다른 이는 ‘가을 저녁의 허무’를 느낍니다. 같은 그림이지만 이름은 백 가지, 해석은 천 가지가 됩니다. 정답이 없으니 오히려 모두가 정답이 되는 세계. 무제라는 두 글자는 그 무한성을 보여줍니다.
내 삶도 종종 무제였습니다. ‘학생’, ‘작가’, ‘엄마’ 같은 사회가 붙여준 이름들이 있었지만, 그 단어들이 나를 온전히 담아낸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넌 글 쓰는 사람이잖아”, “사진을 찍는 작가잖아”라 말했지만, 나는 그 호칭 앞에서 늘 머뭇거렸습니다. 이름이란 것이 이렇게 사람을 가두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무제이고 싶었습니다. 무제의 나는 정해진 역할에서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웠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나조차도 나를 규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제목을 요구합니다. 출판 원고를 내면 가장 먼저 묻는 게 제목이고, 사진을 전시하려면 주제를 정하라 합니다. 브런치북 공모에 응모할 때도 가장 먼저 고민했던 건 글의 완성도가 아니라 ‘제목이 무엇인가요?’였어요. 그럴 때마다 답답했습니다. ‘무제’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이유와 맥락을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제목 없는 작품은 미완성처럼 보였고, 심지어 게으른 결과물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무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과잉이었습니다. 차마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많았고, 사유가 넘쳐흘렀고, 기억이 잘게 흩어져 있었던 겁니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걸었던 어느 날이 떠오릅니다. 초점은 맞지 않았고, 빛은 번졌습니다. 인화된 사진은 흐릿했고, 인물조차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아름다웠습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제목을 붙였습니다. 누군가는 ‘비 오는 날의 고독’이라 불렀고, 또 다른 이는 ‘첫사랑의 얼굴 같다’ 했습니다. 나조차도 순간마다 다르게 불렀습니다. 같은 이미지인데도 마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무제의 힘이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정답이 없는 이름은 그래서 모두의 이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마음속에도 여전히 무제들이 많습니다. 용서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사랑이라 부르지 못한 관계, 상처라 꺼내지 못한 아픔들. 그것들은 아직도 무제의 상태로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무제가 있기에 나는 여전히 글을 씁니다. 언젠가 이름을 붙일 날을 기다리며. 혹은 끝내 붙이지 못한다 해도, 그 시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하는 힘으로 남을 것이라 믿으며.
무제를 사랑하는 마음은 삶을 사랑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습니다. 인생은 본래 이름 붙일 수 없는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행복이라 부르기엔 슬픔이 섞여 있고, 절망이라 정의하기엔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단어와 감정의 경계는 늘 흐릿합니다. 그래서 무제는 오히려 삶의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무제였고, 죽음 또한 무제일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잠시 이름을 얻고, 호칭을 나누고, 타인의 언어로 불리다가, 결국 돌아가는 자리는 다시 무제의 자리입니다.
나는 가끔 상상합니다. 언젠가 내 묘비에 ‘무제’라고 새겨져 있는 모습을. 화려한 칭호나 장황한 연보 대신, 단 두 글자로 충분합니다. 살아온 날들이 무제였기에, 떠나는 날 또한 무제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내 묘비를 바라보며 각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말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미완의 작가’라 말할 겁니다. 누군가는 그저 ‘이름 없는 이름’으로 기억하겠지요. 그 모든 해석이 옳고, 그 모든 이름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무제의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한 줄마다 제목을 붙이지 않고, 그냥 흐르게 둡니다. 누군가 웃음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곧 제목이 됩니다. 다른 누군가 눈시울을 붉힌다면 그 또한 제목이 됩니다. 제목 없는 이 글은 그래서 무한히 많은 제목을 가진 글이 됩니다. 무제라는 껍질 속에서, 나는 오히려 무수한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당신에게 ‘무제’는 어떤 이름일까요? 댓글로, 혹은 당신의 마음속에서만이라도, 그 제목을 붙여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