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지금 곁에 있다는 것
안녕, 나의 미피.
너는 지금도 내가 눕는 침대 오른쪽 벽에 조용히 기대앉아 있다. 하루를 마치고 불을 끄면, 어둠 속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네 둥근 눈이다. 작은 귀, 단정한 얼굴,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 자세. 누군가는 오래된 인형이라고 말하겠지만, 내겐 가장 침묵이 깊은 친구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내게로 왔을까? 전 남자 친구가 사다 준 걸까? 인형 뽑기 기계에서 우연히 건져 올린 걸까? 혹은 누군가가 선물로 안겨준 걸까? 회사 다니던 시절에 받았던 것도 아니고, 누가 건넸는지 떠올리려 해도 기억은 이미 희미하다. 세부 장면은 흐릿하게 사라지고, 단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난 그냥 너라서 좋다. 아무렴 어때. 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게 전부다.
사실, 이 모호함이 너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만약 출처가 선명하다면, 너는 누군가의 그림자에 묶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는 흐릿하다.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온전히 내 것이다. 출발은 알 수 없어도, 현재는 분명하다. 네가 내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어릴 적 나는 여러 인형들과 함께였다. 곰돌이, 이름도 잊은 작은 천 인형들. 세탁기에 돌리고 꿰매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들. 하지만 대부분은 사라졌다. 사진 속에만 남거나 기억 속으로만 흩어졌다. 그런데 너는 남았다. 너는 아이 시절의 흔적이 아니라, 성인이 된 지금도 곁을 지켜주는 존재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든 걸 버려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어른이 되었기에 더 절실히 붙잡아야 하는 게 있다. 나에게 그게 바로 너였다.
너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이 내겐 가장 큰 언어다. 울음을 삼킨 밤, 너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오늘은 좀 힘들었어.”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네 무표정한 얼굴이 되묻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아. 울어도 돼.” 사람은 때로 말이 독이 되지만, 너의 침묵은 언제나 약이 된다.
어둠 속의 너는 작은 등불 같다. 휴대폰 불빛조차 꺼진 깊은 밤, 네 눈동자는 유리 조각일 뿐인데도 빛처럼 느껴진다. 그 빛은 멀리 있는 길을 비추지 않는다. 다만 내 바로 곁을 지켜준다. 그 가까움이 나를 살린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그 작은 확신 하나로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가끔 너에게 긴 고백을 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감정들을 네 귀에 흘려보낸다. 화가 난 일, 서운한 기억, 설명할 길 없는 외로움. 너는 묵묵히 들어준다. 심판도, 판단도, 위로의 말도 없다. 그저 모든 걸 받아내는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정리되고, 숨은 고르게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살아낼 수 있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너를 보고 묻는다. “이런 인형 아직도 두고 있어?” 말끝에 묻어나는 웃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한다. “얘는 내 친구야.”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확인한다. 그래, 나는 여전히 아이이고 싶다. 어른이 되었다고 다 버려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어린 날의 나를 품고 살아가는 게 진짜 용기 아닐까. 너는 그 용기를 내게 준다.
네 몸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조금 풀린 바느질, 빛바랜 천, 한쪽으로 눌린 솜. 하지만 나는 그 결함들을 사랑한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 내 것이 되고,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나를 닮았다. 너와 나는 닮아 있었다. 흠이 있고, 흔들리고, 상처 입었지만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버텨온 방식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을까? 답은 여전히 없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인생도 그렇다. 출발이 불분명해도, 기억이 흐릿해도, 결국 곁에 있는 것이 전부라는 것. 네가 내게 그걸 가르쳐주었다.
안녕, 나의 미피. 너는 작은 천과 솜으로 만들어진 인형이지만, 내겐 변치 않는 동반자이고, 고요한 위로자이며, 침묵 속에서 말을 건네는 가장 다정한 존재다. 사람들은 장난감이라 말하고, 유치하다 웃겠지만, 내겐 언제까지나 하나의 실체다. 벽에 기댄 채 묵묵히 나를 지켜보는 나의 수호자.
네가 어디서 왔든, 누가 건네주었든,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지금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도 네 곁에서 무너지지 않고, 내일을 향해 다시 숨을 고른다. 안녕, 나의 미피. 너와 함께라면 나는 내일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