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남은 기억과 진심에 대한 고백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삶의 초반부를 가득 채우던 장면들이 수채화처럼 번져 있다. 선명하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마치 오래된 필름을 빛에 비춰볼 때 나타나는 흔적 같다. 그 흔적은 언제나 흐릿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흐릿함이 내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더 선명했다.
창문 너머로 스쳐가던 기차의 잔상, 운동장 모래 위에 어른거리던 그림자, 가을 저녁 하굣길에 내리던 서늘한 바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제대로 붙잡을 수 없는데도 확실하게 존재한다. 정확한 날짜나 위치는 사라졌는데, 감각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색이 바래도 표정은 여전히 읽히듯, 나의 기억도 그렇게 희미한 빛을 품고 있다.
어렴풋이 남은 얼굴들도 있다. 이름은 잊혔고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지만, 웃을 때 입가에 생기던 작은 주름, 불안할 때 미묘하게 흔들리던 눈동자, 내 손끝을 스쳐간 짧은 접촉 같은 건 몸이 먼저 기억한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우정이었는지, 잠깐 스쳐간 인연이었는지 규정할 수 없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씨앗처럼 남아 자라난다. 그 존재는 흐릿하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자주 꿈속에서 그런 그림자를 마주한다. 꿈에서는 그들이 확실히 나를 알아보는 듯 다가오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얼굴은 뭉개지고 이름은 사라진다. 남는 건 설명할 수 없는 울림뿐. 그 울림이야말로 어렴풋이 남은 세계의 실체다.
어렴풋한 것은 늘 그리움과 닮았다. 명확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간절하다. 선명한 상처는 언젠가 아물지만, 희미한 흉터는 오래도록 시선을 끈다. 그 모호함이 마음속을 파고든다. 그래서 우리는 어렴풋한 것들 속에서 스스로를 확인한다.
나는 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이야말로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는 걸. 어린 시절 장독대 위로 내리던 빗소리, 겨울 골목에서 풍겨오던 국밥집의 김, 봄날 창문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의 온도. 구체적 장면은 희미해졌는데, 감각만은 여전히 내 몸에 배어 있다. 기억은 종종 장면이 아니라 냄새와 소리, 촉감으로 남는다. 그게 나를 이끌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했다.
삶은 결국 어렴풋함의 연속이 아닐까. 우리는 매 순간을 붙잡으려 하지만,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진다. 그러나 바로 그 흐릿함이 삶의 진짜 질감이다. 너무 선명하면 금세 질리고, 완전히 사라지면 그리움조차 없겠지만, 희미하게 남았을 때 가장 오랫동안 가슴에 맴돈다.
나는 종종 오늘의 순간도 언젠가 어렴풋한 추억으로 남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마시는 차의 미묘한 향, 친구와 나눈 짧은 대화, 창밖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지금은 별것 아닌 듯 스쳐가지만, 훗날 문득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할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기억난다는 말은 결국, 그 순간이 내게 특별했음을 고백하는 다른 표현이다.
어렴풋함은 때로 위로가 된다. 완전히 잊히지 않았기에,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흐릿함은 가능성을 남긴다.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그래서 나는 어렴풋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덕에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고 느낀다.
만약 어렴풋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메마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정확한 것보다 흐릿한 것이 더 진실하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나를 울리고 웃기며, 또다시 걸음을 내딛게 한다.
어렴풋이, 나는 여전히 그날의 바람을 기억한다. 겨울 아침 목도리 틈으로 스며들던 차가운 공기, 그 공기 속에서 웃던 누군가의 모습. 그 순간은 이미 흘러갔지만 감각은 남았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모든 희미한 것들이 결국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희미해서 오히려 더 빛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어렴풋이 남은 세계다.
그리고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한다고 믿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를. 진심도 결국은 진심을 알아보는 이에게만 전해진다는 것을. 고요하게 마음을 내밀어도, 그 고요함조차 벽처럼 사람을 가려낸다. 모든 이에게 닿는 건 아니다. 인생은 본래 그런 것이고, 세상은 내 마음의 무게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나와 같지 않은 마음, 나와 다른 시선,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아간다. 내가 전한 마음은 상대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빛이 되기도 하고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결국 어렴풋이 남는 것들은 삶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선명하지 않음이 오히려 삶의 진실을 더듬게 하고, 그 진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라난다. 어렴풋한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나는 끝내 알게 된다.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은 언제나 선명한 기록이 아니라, 희미하게 남은 어렴풋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흐릿함 속에서도 빛나는 것들을 품은 채.